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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般若心經(完譯本 - 1)
 닉네임 : 현담  2013-06-12 15:39:18   조회: 2076   
般若心經 ( 完譯本-1)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 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度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 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도


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增不減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증불감


不垢不淨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불구부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


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야바라밀다고 심무괘애 무괘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 得 阿耨多羅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파라밀다 고 득 아뇩다라


三藐三菩提 故 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삼막삼보리 고 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


波羅蜜多呪 卽說呪曰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菩提 娑婆訶

모지 사바하



게체 게체 파라 게체 파라승게체 보제 사파가


인생 성공의 길. (우리말 반야심경)

스스로 보는 자와 보는 과정을 지켜봄으로

나 없음, 시간 공간 없는 마음 없음 지켜봄 속에서 깊은 기쁨이 충만하고

마음 없음의 지켜보는 눈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보니

오색의 빛과 색 같이 없는 듯 있는 것을 바르게 보고 마음의 동일시에서 벗어났다.

그대여,

빛과 색이 마음 없음과 다르지 않고 마음 없음과 빛과 색이 다르지 않으며 빛과 오색이 곧 마음 없음과 같다.

마음 없음 지켜봄이 빛과 색상이니 빛과 오색같이 생로병사 속에서 보고 익힌 것을 근본으로 생각하여 동작으로 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스스로 이해하는 것도 빛과 색상, 마음 없음과 같이 다르지 않다.

그대여,

위의 마음 없음 지켜봄은 만들어 지거나 태어나지도 않으며 없어지거나 죽지도 않으며 커지거나 작아지는 변화도 없다.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않다.

그런 연고로 빛과 어둠이 있는 마음 없음 지켜 봄 속내에는 빛도 어둠도 없다. 마음 없음 지켜봄 속에는

오색과 빛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의미 의식이 없기에 빛 소리 냄새 맛 촉감도 없다.

눈이 없기에 눈으로 보는 대상이 없고 보이는 대상이 없기에 색, 수, 상, 행, 식이 없으므로 의미 의식을 인식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고 나고 죽는 이치를 모르는 것이 없으므로 깨닫지 못함도 없다.

나고 늙고 죽음도 없다. 또한 나고 늙고 죽음을 초월하는 것도 없다.

고통과 집착을 없애는 것도 없다. 이해와 오해도 얻음도 없다.


그러므로 아누다라삼막삼보제를 얻고자 하는 자와 얻은 자는 위의 내용을 항상 자신의 입은 옷처럼 의지하면 의식 속,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그물에 걸려 막히고 방해되는 것이 없어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고통의 그물에 걸려 도깨비 같이 날뛰고 거꾸로 매달려 허둥대며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의 동일시 사라져 맑고 밝은 보는 자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죽음의 탐구를 완전히 끝내고 환희 속에서 마음 없음 지켜봄으로 영원세계를 성취하였다.


과거 현재 미래에 스스로 자신을 보고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이 마음 없음 지켜봄을 길 가는 이정표로 몸에 입은 옷처럼 하라, 그리하면 성취하리라.


밤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보이지 않는 욕망의 그물에 걸려 수풀이 무성한 깊고 어두운 밤에 홀로 벌거벗은 나신으로 버려진 가운데 도깨비, 뱀, 호랑이, 지네가 나를 잡아먹고자 바로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삶과 죽음의 공포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세계를 얻게 되리라. 그러므로 바르게 보고 알라, 지켜봄 마음 없음은 참으로 허망하지 않고 한 순간에 모든 망상, 공포. 두려움, 고통,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여 진실하다.

그런 연고로 영원세계에 들면 위의 내용은 가장 큰 신비로 영롱한 축원 축복이며 가장 크고 밝은 축원 축복이며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궁극의 축원 축복이다.

소유하고 있는 모든 괴로움 고통 모두 소멸되나니 허망하지 않고 오직 진실하다.

그런 연고로 축원 축복을 말하여 주리다.

갔다, 갔다, 아주 갔다, 무심으로 마음의 동일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영원을 성취하였다. 사바하





『나를 보고 아는 길, 』


마 하 반 야 바 라 밀 다 심 경


스승 붓다님께 귀의 합니다.

몸과 혼을 다해 합장으로 엎드려 절 드립니다.

이 글을 쓸 수 있고 쓰게 하여 주신 모든 인연들에도 엎드려 절 드립니다.

한자로 제목은 10자요, 본문은 260자로 기록되어 있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이렇게 글로 그려 봅니다.

본문 단어 하나하나에 들어가기 전, 전체를 살펴보고 난 뒤에 본문 한 문장, 한 글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반야심경이라 불리는 이 기록물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것이고 또한 이 보다 더 높고 완벽한 기록물은 없을 것입니다.

반야심경 전체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며 이 글을 읽고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이해 체득한 사람은 무엇을 얻고 어떻게 변할 것인가? 또한 무엇에 대한 기록물인 것인가?

먼저 이 글을 이해 체득한 사람은 두려움, 공포가 없어지고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며 개인 자신 스스로의 생로병사와 삶, 죽음을 보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 260자 전체 내용은 오직 개인 내면, 마음과 그 마음을 보는 자에 대하여 사리자라는 제자를 대상으로 설법을 하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는 자와 대상에 대한 설법인 것입니다.

또한 이 기록물은 총 270자로 가록되어 있지만 붓다님 가르침의 모든 것, 즉 팔만대장경 40여년의 설법 모두가 압축된 기록물인 것입니다. 여기 270자 내용을 이해 체득한다면

굳이 다른 경전을 보지 않아도 스스로 모두 볼 수 있는 눈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이 문구는 제목으로 쓰여 지고 있으나 원래는 제목이 없는 글이었습니다. 원래 제목 없는 글을 누구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스승 붓다님이 붙인 것이 아니 입니다. 이 문헌을 기록하는 기록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제목으로 뜻은 본문을 이해하여야 제목이 갖고 있는 문자 너머의 의미를 보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먼저 설명하고 난 다음에 제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언제 어디서 누가 기록하였는지 모르는 기록물이나 스승 붓다의 육언,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 실체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보고 알지 못한 사람은 그런 표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스승 붓다님의 40여년 가르침의 내용 모두를 담고 있고 팔만대장경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는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앞으로 본문을 설명하고 이해하게 되면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말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 말을 듣는 자는 누구인지 관찰하고 본문에 들어가야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자는 부처님, 즉 붓다 석가모니이신데 부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말하는 자, 붓다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스스로 붓다가 되지 않는 한 생각, 논리, 사상으로 하는 이해는 오해에 불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붓다에 대한 이해를 할 것인가?

육신을 지닌 붓다는 255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어떻게 보고 이해할 것인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이 방법을 권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을 탐독한다면 스승 붓다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예로 금강경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제 5 분 여리실견(如理實見)에서 스승 부처님이 제자 수보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 世尊 不可以身相

수보제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 불야 세존 불가이신상

수보리야 이 내 몸, 육신이 부처인가?

수보리의 답변은 스승 육신을 부처로 보지 않습니다, 스승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육신은

몸 아닌 몸, 즉비신상(卽非身相)입니다.

스승 부처님께서 제자 수보리 답변을 듣고 다시 알려 줍니다.

불고 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佛告 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나를 있는 그대로 진신을 볼 여면 이렇게 보아야 한다.

너의 육안과 마음으로 보고 아는 그 모든 것이 오해이고 잘못 보는 것이며 너의 육안의 눈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몸 아닌 몸, 나 아닌 나가 아니라고 본다면 곧 나를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스승 부처님이 제자 수보리에게 부처인 스승을 어떻게 보는가?

보는 방법과 보고난 후를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위의 문장에서 보듯 붓다 부처라는 실존을 보통사람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일 수도 있습니다.

이 반야심경을 구술 설명하는 자, 붓다 부처를 완전히 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또한 이 말을 듣고 보는 제자 사리자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일반 보통사람들에게는 불가능일 것입니다.

말하는 자, 부처를 이해하는 방법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보고 이해하면 말하는 자 부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반야심경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금강경을 보고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반야심경을 문자로 읽고 생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진정한 올바른 이해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금강경을 본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 또한 먼 과거에 사용되던 문자 언어로 기록되어 현대인들이 읽어도 이해 불가능이며 또한

많은 번역 주석서들이 있지만 오역으로 인하여 문자를 통한 금강경 이해는 난망입니다.

그리하여 이 글을 쓰는 본인이 번역 해석한 금강경을 정독한다면 여기 반야심경 내용을 구술하는 부처라는 실존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승 부처님이 반야심경을 말씀하실 때 누구에게 왜 그런 설법을 하였는지 관찰 이해하여야

반야심경 본문의 내용을 이해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설법을 들려주는 자는 사리자(사리푸트라)로 이 사람에 대하여 올바른 관찰 이해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반야심경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리자라는 제자를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기초가 됩니다.

사리자(사리푸트라), 여기 반야심경에서 사리자라고 기록된 제자의 인도식 발음은 사리푸트라였다. 그것을 중국에서 음역과 의역을 동시에 행한 이름이 사리자이며 이 사리자라는

제자는 다른 어떤 제자와 비교하여 볼 때 특이한 제자였다. 다른 많은 제자들은 스승 붓다에게 배우고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승을 찾아 왔지만 사리자, 이 제자는 스승 부처님과

싸워, 겨뤄서 이기기 위하여 스승 부처를 찾아온 사람 이였으며 이런 사람이 스승 부처님과

싸우지도 겨루지도 않고 스스로 굴복하여 제자로 입문 후,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들려주는

내용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스승 부처님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 계실 그 당시 인도라는 나라에서는 이런 문화가 있었다.

많은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진리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통한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그런 전통이 있었다. 사리자는 벌써 오천 여 명이나 되는 제자를 거느리고 제왕처럼 행세하며 인도 전역을 순례하며 논쟁에서 항상 승리하였던 스승이며 학자였다. 아마 현 시대 같으면 노벨상 수상, 또는 많은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유명 대학의 저명한 교수 같은 신분으로 보면 유사할 것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이 바로 스승 부처였다. 그리하여 오천 여 명이나 되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하는 무리 제자들을 거느리고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는 장군처럼 스승 부처님과의 논쟁을 통하여 승리하고자 스승 부처님 앞에 다가섰을 때 스승 부처님은 사리자와 그 추종자 무리들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울러 스승 부처님은 사리자를 관(觀)하여 보고 사리자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사리자여! 그대는 많은 것을 보고 알고 방대한 지식이 있지만 사리자 그대 자신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보고 알지 못하며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는 공허하다는 것을 나는 그대로 본다. 사리자여! 그대는 나와 싸워서 이기고자 저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왔다. 좋다, 그대가 나와의 논쟁 싸움을 원한다면 그대의 논쟁 요구에 응하여 주리라,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사라자여! 그대가 나와 진실로 논쟁하고 싶다면 나와 함께 이곳에서 1년을 보낸 뒤에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리자는 스승 부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왜 1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대는 1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나와 논쟁하기 위한 통과 조건이다. 사리자 그대는 1년 동안 침묵을 지킨 뒤에야 나와 논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무심에서 나온 말들을 그대에게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리자 그대는 나와 논쟁하기 전에 무심(마음 없음)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경험할 필요가 있다. 사리자여 내가 지금 관(觀)하여 보니 사리자 그대는 단 한순간도 무심(삼매 무아)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대는

항상 온 몸, 머리에 온갖 잡다한 지식 잡념으로 가득 차 넘치고 있다. 그대의 몸 머리는 너무 크고 무거워 견디기도 어렵다. 사리자여 나는 그대에게 애틋한 연민을 느낀다. 그대는 여러 생(윤회) 동안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집착하며 살아 왔다. 그대는 이번 생뿐만 아니라 여러 생 동안 브라만(힌두교 성자)이였으며 그대는 베다(힌두고 경전)와 갖가지 경전에 묻혀 살아 왔다. 이것이 그대가 이번 생뿐만 아니라 여러 생 동안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서 가능성을 본다. 그대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가능성은 있다, 아직 지식이 그대의 존재를 완전히 가로 막지는 못 했다.

아직 몇 개의 문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일 년 동안 그 문을 열고자 한다, 그 때 비로소 우리가 깊은 곳에서 만나 논쟁이 아니라 상통하는 대화의 가능성이 생겨 날 것이다.

사리자여, 1년 동안 여기서 머물도록 하라“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사리지는 인도 전역을 순례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것이 당시 그 사회의 전통 풍조였다. 박식한 사람들은 나라 전역을 여행하며 대규모 장기적인 토론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상대를 꺾고 전국적인 승리를 하면 그것은 커다란 에고의 만족을

가져다주며 그는 왕이나 황제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존경 받았으며 그 어떤 부호보다도 더 위대한 거물로 인정받았다.

사리자 또한 그렇게 전국을 떠돌며 많은 상대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으나 부처님을 꺾지 않고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리자는 이런 목적으로 오천 여명이나 되는 추종자를 거느리고 부처님을 이기고자 찾아 간 것 이였다.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사리자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갔으면서도 부처님의 제의에 따르기로 합니다.

“좋습니다, 제가 1년 동안 여기서 머물며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며 승낙하였다. 그리고 사리자는 부처님 곁에 머물며 1년 동안 부처님과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부처님의 설법을 먼발치에서 듣고 지켜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을 일별하고 서서히 침묵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년이 되던 날, 부처님이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사리자여! 이제 우리가 논쟁할 때가 왔다, 나는 그대에게 패한다 하더라도 말할 수 없이 기쁠 것이다”

그러자 사리자는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부처님 앞에 엎드려 경배를 드리며 말하였다.

“부디 저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지난 1년 동안 침묵을 지키며 당신의 말씀을 듣는 동안 몇 차례나 저에게는 섬광 같은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애초에 저는 당신과 싸워 이기고자 왔지만 어차피 1년 동안 여기에 있을 것이라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손해 볼 일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호기심을 가지고 당신의 말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인가 당신은 저의 내면을 뚫고 들어 왔습니다. 당신은 저의 가슴을 흥건히 적셔 주었으며 저의 내면에 있는 눈을 열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눈으로 보았습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패배시키지 않고도 저를 이기셨습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제자로 귀의했고 그의 추종자 5천 여 명도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사리자는 그 당시 인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힌두교 신자이며 힌두교 경전인 베다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지닌 힌두교인 으로 부처님에게 이렇게 다가 왔으며 그렇게 불교로 개종한

그런 사람이 부처님 제자로 입문 후 몇 년이란 수행이 지난 뒤, 그런 제자에게 밀어적인 속삭임 속에서 설명 되어지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입니다. 이런 연유의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깊이 이해하고 본문을 보아야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을 보는 그대는 과연 얼마나 깊은 안목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 관찰하고 이 경전을 탐구한다면 이 기록물이 그대의 혜안을 열어주는 열쇠 같은 중요한 가르침이며 스승 부처님이 사리자가 아니라 그대에게 주는 스승 부처님의 가피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또한 본문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이해되어야 할 것은 이 기록물이 인도 언어와 한문 혼용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하며 인도어는 소리글자이고 한문은 뜻글자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도 고어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한문도 뜻글자이긴 하지만 시간 공간 속에서 그 의미가 변질되어 집니다. 여기 한자 270자는 지금부터 약 2천 여 년 전에 중국에서 인도어를 한문으로 번역 기록한 것을 우리 한반도에서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 읽고 보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한자 이 기록물 단어 문장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 실체를 과거 스승 부처님이 의도하였던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난해한 일일 것입니다.

아마도 현 한국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 그 누구도 이 기록물을 읽어 보아 스승

부처님의 의미하였던 실체를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문자는 남아 있으되 문자 넘어 의미 실체를 사라진 그림 속의 떡 같은 기록물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불교 속에서 이 기록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근본이며 핵심적인 형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불자, 불교의 종교인이면 누구나 암송 기억하는 그런 기록물입니다. 한국의 민요 아리랑이나 애국가 같이 불자이면 의무내지 관습처럼 암기하여 노래처럼 되어버린 것이 한국 불교 속의 반야심경입니다. 이런 현상을 넘어 사문화된 한국 반야심경을 스승 부처님 말씀의 의미가 다시 살아나 많은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전달되어지길 바라면서 이 글을 씁니다.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 波羅蜜多 時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 바라밀다 시)

이것이 반야심경 본문의 첫 문장인데 간단하게는 이러한 의미로 비유됩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을 때, 그 순간에 라는 의미로 비유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누구란 관자재보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자재보살이란 누구이며 무엇인가?

*무엇이란 바라밀다,

*어떻게는 반야

*하고 있는 행심

*순간, 때 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많은 경전은 제자들 질문에 답하거나 아니면 스승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 답변 형식으로 대부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반야심경은 사리자라는 제자가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스승 부처님이 사리자에게 질문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형식으로 기록된 기록물입니다. 반야심경 전체 내용을 이해하면 왜 이런 형식으로 기록되었는지 보일 것입니다. 이 기록물 내용의 흐름은 스승 부처님과 제자 수보리 단둘이서만 밀어 즉 달콤한 속삭임 같은 형식으로 흘러갑니다. 스승 부처님의 엄한 지식 전달도 아니고 제자가 알고 싶어 하는 욕망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아니며 스승 부처님의 제자 사랑으로 은밀히 속삭이는 자비의 나눔 같은 형식으로 흘러갑니다.

제자 수보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사랑의 노래처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 사리자도 의문의 질문은 하지 않고 그렇다고 의심도 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스승 부처님이 제자에게 통고, 고지, 전달 같은 형식이 아니라 하늘의 태양 같고 내리는 빗물처럼 비추어주고 적셔주는 자비의 법 비를 내려주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이란 누구이며 무엇인가?

관자재보살, 이 다섯 글자가 반야심경의 핵심이며 이 관자재보살이란 문자 기호 너머의 의미 실체를 이해한다면 뒷부분 기록 내용은 저절로 이해되고 보여 지며 전체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 관자재보살이란 이 다섯 글자 너머의 의미 실체는 진정 어떠한 무엇인가?

글과 문자 생각으로 표현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실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평생 많은 제자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하였던 핵심적인 것이 바로

관자재보살인 것입니다.

그럼 관자재보살이란 어떠한 무엇인가?

과거를 거슬러 여러 방향에서 관찰하여 볼 것입니다.

관자재보살, 이 단어 문자는 인도의 부처님이 발견한 것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인도의 부처님이 사용하고 입에서 나온 언어 문자는 무엇이었는가?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 보디사트바(bodhisattva)인데 이것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 관자재보살이다.

그럼 인도어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 이 언어 속 의미 실체는 무엇인가? 어떠한 것인데 중국에서 관자재보살이라 번역 기록하였을까? 중국의 번역자들은 산스크리트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번역하였을까? 뜻글자인 한자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소리글자인 인도어 언어 속

의미 실체를 어떻게 이해 체득하였을까?

이 부분을 잘 관찰해보면 한자 관자재보살과 인도어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란 의미 실체를 올바르게 이해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어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 이 문장 속 의미를 이해하는데 비유적으로 이와 같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 몸에 있는 눈의 역할 작용원리를 세밀하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눈 부분만 관찰한다면 깊고 올바른 이해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발끝에서 부터 온 몸 구석구석을 관찰하고 눈만 남겨둔다면 눈의 역할 작용 원리, 눈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승 부처님 기록물 전체를 관찰하면 즉 팔만대장경 같은 많은 기록물을 관찰하면 인도어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란 문자 속 의미가 무엇인지 나타나기 시작하며 확연히 보일 것입니다. 또, 한 예로 금강경이나 법화경 전체를 탐구하면 아발로키테스바라라는 인도어 의미가 저절로 보일 것입니다. 이런 이치로 중국 불경 번역자들은 새로운 문자와 단어를 창조하여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인도어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 이 단어 속 의미를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하는데 번역자들은 많은 애로사항을 느꼈을 것입니다. 중국 과거 역사 속에서 그런 의미 실체를 본 자나 표현한 문자 기록물이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새로운 의미에 맞는 문자와 단어를 창조하여 의미를 만들어야 하기에 번역 기록자들은 고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도어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란 의미를 지닌 한자 단어 즉,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세음보살 (觀世音菩薩) ,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 보안보살,(普眼菩薩) 관보현보살, 불타, 여래, 혜안, 지혜, 불법, 진아, 무아 등등의 많은 문자 단어를 창조하였던 것입니다.

위에 나열된 단어들은 문자는 달라도 한 실체를 표현한 단어 문자들이란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인데 관자재, 관세음, 보안장보살, 관보현보살이란 단어 너머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렇게 하면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관자재와 관세음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법화삼부경중 묘법연화경 내의 25분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정독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줄여서 관음경이라고도 합니다. 여기 관음경 내용의 일부 중요한 부분을 여기에 적으면 이러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 무진의보살이란 이름을 지닌 제자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떤 연유와 이치로 관세음, 관자재라 이름 합니까?”

無盡意菩薩 而作是言 世尊 觀世音(觀自在)菩薩 以何因緣 名 觀世音

무진의보살 이작시언 세존 관세음(관자재)보살 이하인연 명 관세음 佛告... 하는 질문은 여기 반야심경의 첫머리 관자재를 스승 부처님이 관자재란 이러하다 하고 자세히 설법하여 주고 있습니다.(관음경, 본인이 한문 원본 해석 출판한 책을 권합니다.)

천수천안관자재보살, 이 단어 속 의미는 관자재란 사람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같은 능력과 작용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원각경에 나오는 보안(普眼)보살이란 단어 속 의미는 넓게 보는 눈, 태양 같은 눈이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관보현보살은 넓게 나타내어 본다, 또는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자, 본다는 의미를 포함하며 여래, 혜안, 지혜, 불법, 진아, 무아 이 단어들도 모두 본다, 보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는 단어들입니다. 이렇게 여러 단어들을 비교하여 봄으로 인도어 아발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를 보는 자, 보는 것, 관찰, 주시, 응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 불교 경전 천수경 내의 신묘장구대다라니 내용도 잘 관찰 이해하면 관자재를 설명하여 주는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창조한 관자재란 단어의 의미 생성 과정과 유사한 번역 단어들을 살펴봄으로 관자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고로 인도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이란 단어가 있는데 불교의 관자재 아발로카테스바라와 유사한 것으로 여기에 적어 드리면 보고, 보여지고, 알려지는 자, 보고 이해하는 자, 즉 눈이란 의미를 지닌 단어인데 힌두교에서는 이 자를

참 나, 진아, 라고 표현합니다.

관자재와 관세음은 한 실체를 다르게 표현 기록한 문자 단어인데 앞으로 두 단어 문자를 자세히 관찰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보고 올바른 이해 체득도 중요하지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스스로 오해하였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제가 관찰한 바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 스스로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면서도 그것이 올바른 이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 자신도 과거에는 그렇게 오해 속에서 살아 왔지만...

관자재, 관세음은 같은 실체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실체가 어느 곳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앞으로 진행 기록할 것입니다.

또한 보살(菩薩)이란 문자 단어만큼 오용 오해된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인도어 보디사트바를 중국에서 보살이란 문자 단어로 번역하였으며 보살, 이 단어 속 의미 실체를 가장 정확 올바르게 설명된 부분을 여기에 기록 합니다. 국어사전이나 어느 스승, 대사, 선사의 설명이 아니라 스승 부처님의 육언 설명이 있습니다.

금강경 내에서 어떤 것을 보살이라 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 17분 구경무아(究竟無我) 내용 중 마지막,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제 약보살 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수보리야, 깨달은 보살이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무아인중수자, 즉 무아통달한 사람, 사상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주시자가 된 자를 스승 부처 여래는 올바른 참다운 보살이라 호칭한다.

이것이 보살, 보디사트바라는 단어 속의 가장 정확한 설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불교와 사회 속에서는 여러 의미로 오해 해석하며 흘러 다니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 이 단어 너머의 의미 실체를 이해 체득하여야 뒤에 오는

행심 반야 바라밀다 시(行深 般若 波羅蜜多 時)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관자재보살, 이 단어를 하나로 볼 것인가? 아니면 관자재와 보살, 두 개의 의미로 볼 것인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단어입니다. 이렇게 비유하여 보겠습니다.

여자는 사람이다, 라는 문장을 보면 여자와 사람은 두 개의 단어입니다. 여자를 여자로 호칭할 수 있고 또한 사람이라 호칭하여도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유로 본다면 스스로 보는 자, 관찰자, 주시자, 그 자가 바로 보살이라 하여도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관자재라 칭하지 왜 보살이란 단어를 연결하여 표현하였을까? 문자로 설명이 난해합니다. 관자재란 인격, 인품을 지닌 존재가 아닙니다. 보살이란 단어 의미 속에도 일반적인 개념을 초월하는 실존적인 현상을 포함하나 무인격, 무인품이 아니라 없는 듯 있는 비인격, 비인품적인 의미가 내재되었기에 관자재보살이라 표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보통 현시대 사람들의 이해는 관자재보살하면 혼미한 망상으로 생각 이해할 것입니다. 또는 신(神)과 같은 존재, 자신과는 무관한 대단한 능력자, 즉 전지전능의 창조자 또는 하느님같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묘하지만 관자재보살이란 의미 속에는 모든 개개인 사람이란 의미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관자재보살이란 단어 설명을 봄으로 그냥 한자 관자재보살이라 표현된 문자를 보는 것 보다는 조금이나마 올바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렇게 기록하여 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 몸속에 거주하는 관찰자, 눈, 보는 자, 주시자라고 표현하여 보겠습니다. 즉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 개인 속에도 관자재보살이 존재한다, 라고 여기에 기록하겠습니다.

다시 살피면 이 반야심경은 누구를 위하고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 글인가? 이 반야심경은 붓다, 사리자, 불교조직, 승려들을 위한 글이 아니라 이 글을 읽고 보는 개인 사람을 위한 기록물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보는 사람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 내용인가? 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하여 부처되길 바라며 부처되는 방법에 대한 설명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관자재보살이란 이 글을 보는 개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보는 자, 주시자, 응시자, 관찰자, 눈, 혜안을 의미하고 있다고 이해한다면 올바를 것입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관자재보살을 살펴보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이 다섯 글자를 깊이 이해하여야 제목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란 문자 너머의 의미 실체를 이해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자재보살,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비추어 보고 여기 다시 설명되는 내용을 관찰 이해하므로 올바른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 설명되는 내용을 지식으로 기억 암기 암송한다고 이해한 것은 아니 입니다. 반야심경은 견성성불(見性成佛), 즉 자신의 존재 실존을 있는 그대로 보아 이해하기 위한 스승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자신 내면으로 들어가는 이정표, 안내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관자재보살과 본문 전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 글을 읽기를 잠시 멈추고 두 눈을 조용히 감고 아래와 같이 한 후에 이 글을 탐독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의 상상으로 이와 같은 그림을 그려 보세요.

계절은 초가을 하루 중 오후 초저녁 황혼이 질 무렵, 장소는 스스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강으로 물은 맑고 천천히 흐르고 물결은 잔잔하며 강 먼 쪽의 해는 황혼을 드리우고 황혼의 햇빛 아래에는 큰 산이 있고 그 산 밑에는 희미한 어둠이 서려있으며 주위에는 춥지도 덥지도 않는 감미로운 미풍이 불어오고 강의 양 쪽에는 은빛모래가 길게 늘어져 있으며 그 강물 위에 두 사람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배가 있고 그 강 주변에는 타인은 아무도 없으며 오직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 그 연인은 결혼 한지 약 15일정도 지난 밀월의 상태에서 두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단둘이 그 배를 타고 그 강을 아주 천천히 건너고 있다고 상상의 그림을 그려 보세요, 주변은 오직 정막 고요함만 흐르고 감미로운 미풍이 온 몸을 감싸 흐르는 그런 상상 속에서 연인이 나누는 최고의 사랑의 밀어라 여기시라, 그 대화 내용이 바로 관자재보살 행심 이란 것입니다. 또한 위와 같은 상상의 그림을 그린 머릿속 행위자 또 그림으로 나타난 그 모습은 어디에서 창조되어 머릿속에 나타났는가?

조용한 마음으로 자세히 관찰하여 보세요. 분명한 것은 이 글을 보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 자, 행위자, 창조자가 있다. 그리고 창조 행위 순간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림의 창조자와 그림을 보는 자는 무엇인가? 그 자에 대한 표현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표현하여도 완전한 표현이 될 수 없다. 개인 스스로 관찰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위 상상의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이유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들은 이러 합니다. 반야심경 전체 내용을 이해 체득하는 것은 지식을 얻고 학위 즉 박사학위를 얻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학습이 아니라 오직 저절로 혼과 마음, 몸에 스며들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경외심 절박함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하여야 만이 반야심경 스승 부처님의 향기가 스며들고 그 향기로 이 글을 읽는 개인들 내면에 아침 태양이 떠올라 서서히 어둠이 사라지듯 하여 각자 개인 머릿속에 중생지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의 동일시 어둠이 사라지고 맑고 밝은 눈이 열려 원리전도 몽상된 망상, 망념을 사라지게 하여(동일시에서 벗어남)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발견관하게 될 것입니다.

관자재(觀自在)보살, 이 다섯 글자속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 체득하게 되면 이 뒤에 오는 문장들 너머 의미 실체는 노력 없이 저절로 이해 체득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란 지식, 논리, 추론적인 마음이란 현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 체험 경험을 통한 스스로가 관자재보살이 되었을 때만이 관자재보살 문자 너머의 의미 실체를 이해 체득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반야심경이란 기록물은 참으로 이상한 기록물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기록물처럼 시작과 끝, 기 승 전 결, 또는 육하원칙 같은 논리적 논술의 기록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떠한 존재 형상을 설명하여 주는 내용도 아니 입니다. 마음 생각 너머 비존재들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이끌어 주는 이정표내지 지도 같으면서도 스스로 소멸, 사라지게 하는 글 아닌 글, 기록물인 것입니다. 참으로 문자 넘어 의미 실체를 설명하기 난해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경전 속에서 여기 반야심경 첫머리에 나오는 관자재와 유사한 기록이 있으니 여기에 적어 보겠습니다.


금강경 제 20분 이색이상(離色離相)

시간 공간 빛 어둠 있다 없다 삶 죽음이라는 대상과의 동일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何以故 如來說具

수보리 어의운하 불 가이구족색신 견부 불야 새존 여래 불응이구족색신 견 하이고 여래설구

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佛也 世尊

족색신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 수보제 어의운하 여래 가이구족제상 견부 불야 세존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여래 불응이구족제상 견 하이고 여래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수보리님아(이 글을 보는 당신), 위의 내용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며 생각하는가?

부처(관자재)라는 것은 시간 공간 빛 어둠 삶 죽음이란 현상을 완전히 떠나서(동일시에서 벗어나) 완전한 보는 자, 몸으로 보는가?

수보리,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세존 여래(관자재보살)는 시간 공간 빛 어둠 삶 죽음의 동일시에서 벗어난 몸으로서 완전한 몸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떤 연유로 그런가 하면 여래님이 말씀하시는 완전한 몸이란(동일시에서 벗어나 보는 자, 관찰자 주시자) 곧 시간 공간 빛 어둠 삶 죽음을 초월한 존재적인 몸이란 시간 공간 빛 어둠 삶 죽음을 초월한 몸(보는 자) 아닌 비존재의 몸(보는 자, 관자재)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글과 말 생각 논리 추론으로만 시간 공간 빛 어둠 삶 죽음을 초월한 몸(관자재보살)이라 이름 하여 부를 뿐입니다.

수보제님아, 구족색신(완전한 빛의 몸, 관자재, 보는 자, 주시자)과 연관하여 뒤의 구족제상(완전한 관찰자와 대상)을 어떻게 보며 이해하며 생각 하는가?

여래(부처)인 나를 가이구족제상(완전한 관찰자, 보는 자)으로 볼 수 없는가?

수보리, 아니 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여래님(부처님)이 말씀하신 제상구족(완전한 보는 자, 관찰자, 관자재)은 곧 완전하지도 불완전하지도 않으며 이것은 글과 말 생각 논리로만 제상구족, 즉 완전한 관찰자, 보는 자, 혜안 관자재라 불려 질 뿐입니다. 또한,


금강경 제 26분 법신비상(法身非相)

진아(眞我) 자아(自我)는 무아(無我)이다. 무아(無我)는 관찰자, 보는 자와 대상이 없다.

또는 그대는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아니다. 그대는 비존재(非存在)이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수보제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부 수보제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관여래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時如來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불언 수보제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왕 즉시여래 수보제 백불언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爾時 世尊 以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불응이삼십이상 관여래 이시 세존 이설게언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금강경 제 26분 법신비상이란 이렇게도 볼 수 있다. 법신(法身)이란 관자재의 의미 실체와 동의어로 볼 수 있다. 그런 연고로 관자재를 유무(有無)가 아닌 비상(非相), 비존재란 의미이다. 또한 법신과 여래도 동의어이다.

법신, 색신, 여래, 관자재, 이 단어들은 한 실체의 다른 이름, 다른 표현일 뿐이다.

관자재, 여래, 법신, 색신이란 존재 실체에 대하여 스승 부처님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여 주고 있다.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수보제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부

이것이 스승 부처님이 제자 수보리에게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질문에 내용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아야 올바른 답을 할 수 있습니다.

가이삼십이상이란 스승 부처님의 육신 몸,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 몸이 진아, 자아, 무아인가? 또는 여래인가? 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수보리 너는 너의 몸, 육신,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진아, 자아, 무아라고 이해하고 느끼고 보는가? 또는 육체 몸이 여래, 법인가?

몸 육체가 나와 나의 진정한 존재인가?

어떻게 이해하고 느끼고 보는가? 라는 의미입니다.

觀如來不, 여기에 핵심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금강경 본문 앞부분에서는 모두 견여래(見如來)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관 여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관(觀)과 견(見)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해하여야 합니다.

보통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관(觀)이나 견(見)을 같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 금강경이란 부처님 말씀 기록물 속에서는 같은 의미로 보면 오해입니다. 관(觀)과 견(見)의 차이점을 알아야 견여래, 관 여래를 이해하여 관자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觀)과 견(見)의 미묘한 차이점과 실체를 여기 글로 적어보면 이러 합니다.

이 설명은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각자 스스로가 관(觀과) 견(見)이란 차이점과 실체를 이해 체득하는데 작은 힌트, 예제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차이점을 살펴보면 이러 합니다.

관(觀)이란 시간적인 측면에서 오직 현재, 지금입니다. 과거나 미래를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현재의 현존적인 측면이고 공간적으로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우주적인 공간을 포함합니다. 즉 오직 현재 과거 미래라는 것과 단절된 상태에서 우주 전체와 분리된 부분, 독립 공간이 아닌 전체와 하나 된 공간적인 상태를 포함하는 순간, 공간에서 본다, 느낀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느낌이란 실체가 중요한데 인간의 느낌이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느낌은 오직 현재의 순간에만 있는 미묘한 감각작용인데 과연 예를 들어 십년 전이나 어제 또는 내일이나 백년 후를 느낄 수 없습니다. 느낌이란 오직 지금 순간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 느낌에 과거나 미래를 끌어 들여서 느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를 든다면 춥다, 덥다는 느낌에 있어서 같은 온도 같은 사람이 순간순간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영하 10도에서 느끼는 그 느낌은 오직 현재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체험한 어느 것과 비교하여 춥다, 더 춥다, 몹시 춥다, 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느낌이란 것도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공간적으로는 어느 장소라는 여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관(觀)이란 문자 속 의미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라는 시간, 공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보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관(主觀)이 아니다, 그렇다고 객관(客觀)도 아닙니다. 보는 자와 대상이 나누어지지 않은 그런 미묘한 상태입니다.


견(見)이란 본다는 자체는 같을 수 있으나 여기서 본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과거 미래를 연관하여 현재를 본다는 의미이며 공간적으로는 일정한 어느 부분이란 의미입니다. 위의 관(觀)이란 상태의 시간 공간이란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만들어진 의식, 무의식, 지식차원의 견해를 동반하는 느낌이 개입된 상태입니다. 좋다, 나쁘다, 이것은 본다와 느낌이 동반된 상태인데 과거와 미래를 기반으로 상대적 비교를 지니고 지금 현재에서 판단하며 오직 주관(主觀) 객관(客觀)적인 바탕에서 보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보는 자와 대상이 완전히 분리된 일반적인 본다는 의미입니다.

觀과 見이란 미묘한 실체를 위와 같이 설명하였지만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觀과 見의 차이점이 어떠하다는 것을 일반 통념적인 견해보다는 깊은 의미를 볼 수 있는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觀과 見에 올바른 이해는 개인 자신 스스로 깊이 탐구하여 자신의 경험 이해로 되었을 때 올바른 이해 체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설명하는 글로는 부족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고요히 살펴보고 깨달아야 자신에 도움이 되는 실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연고로 하여 관여래(관자재), 견여래(관자재)의 차이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에서 견여래(관자재)로 기록된 부분을 예를 들어 나열하여 놓았습니다.

관 여래는 여기 금강경 기록물 중에서는 처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관여래, 견 여래의 차이점을 잘 보고 이해하여야 관자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비교하여 봄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기록물의 제목 속 의미를 간단히 비교하여 보겠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과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이 두 제목은 앞부분 금강과 마하라는 것만 다르고 뒷부분 반야바라밀다는 같은 의미의 단어 조합입니다. 이런 현상 이치로 보더라도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문자만 다르지 문자 넘어 의미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 제목은 스승 부처님이 육언으로 작명하여 주신 제목입니다.

금강경 제 13분 여법수지(如法受持) 내용 중에,

佛告 須菩提 是經 名爲金剛般若波羅蜜 以是名字 汝當奉持

불고 수보제 시경 명위금강반야바라밀 이시명자 여당봉지

수보리야, 지금 내가 말하는 내용을 글과 말로는 지금 이 순간에 무아인중수자를 득하여 혜안을 만드는 말이라 이름 하여 기억하라 입니다. 하지만,

須菩提 佛說 般若波羅蜜 卽非 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수보제 불설 반야바라밀 즉비 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수보리야, 지금 내가 말한 이 순간 무아인중수자를 득하여 혜안을 만든다는 것은 글과 말과 논리로만 그러할 뿐이다.

여기서 두 경전의 제목을 비교 설명하는 것은 관자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설명입니다. 다시, 금강경 제 26분 내용을 관찰하여 보면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

수보제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수보제언 여시여시 이삼십이

相觀如來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상관여래 불어 수보제 약이삼십이상

수보리야,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가? 이 내 몸,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여래(관자재)로 관(觀)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잘 보아야 합니다. 스승 부처님은 자신의 육신 몸을 비유로 들어 제자 수보제 눈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곧 이 내 육신을 여래 관자재 스스로 보는 눈으로 관(觀)하는가?

잘 보세요, 견(見)하는가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관(觀)하는가? 보고 느끼며 나와 하나 되는가 하고 질문 합니다. 이 질문을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너의 몸, 서른 두 곳을 자신의 스스로 보는 눈, 여래, 관자재, 진아, 무아, 라고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가? 라는 의미로 보아도 앞의 설명과 동일합니다. 스승 육신에 대한 觀(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것)을 즉 보는 관점을 질문하였지만 수보리 자신의 몸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수보리 답변을 주의 깊게 잘 보아야 합니다. 수보리의 답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觀如來 여시여시 이삼십이상관여래

수보리가 스승 부처님의 앞 질문에 스스로 보고 아는 대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여시여시, 예 예 그렇게 보고 이해합니다. 당연한 흔들림 없는 확고한 신념(信念)의 대답을 합니다.

스승 부처님 육신의 머리가 여래 관자재입니다, 육신의 눈이 관자재입니다, 코도 관자재입니다, 귀도 여래 관자재입니다, 팔 다리도 여래 관자재입니다, 손발도 여래 관자재입니다, 성기도 여래 관자재입니다, 육신 서른두 부분 모두가 여래 관자재입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이런 의미도 됩니다. 내 몸 육신의 서른두 부분 머리 눈, 귀, 코, 입, 배, 팔다리, 손발, 성기, 치아, 혀, 모두가 수보리 자신의 진아 무아입니다 하고 답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수보리는 자신이 보고 아는 대로 진실을 답변하였습니다. 하지만 스승 부처님의 눈에는 수보리가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보리 제자의 답변을 듣고 스승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다시 설법을 들려줍니다.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時如來

불언 수보제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와 즉시여래

스승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여기에서도 제자 이름을 부르는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라는 의미를 포함 합니다.

앞에서 네가 설명 답변한 것과 같이 나의 몸 서른두 부분이 여래(관자재, 보는 자, 진아, 무아)라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관자재)가 되는 것이다. 수보리야, 육체의 서른두 부분 하나하나가 여래(관자재)라 관(觀)한다면 , 보고 이해한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관자재)라고 관하고 보고 이해하는 것이 된다.

〔여기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 의미 실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불교용어사전에서도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는 전륜성왕이란 의미는 제가 번역 출판한 금강경을 참고 하세요.〕

스승 부처님이 전륜성왕이란 현상을 비유로서 설명하여 주고 그 설명을 들은 수보리는 이렇게 순간적으로 변합니다.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 以三十二相 觀如來

수보제 백불언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응 이삼십이상 관여래


스승 부처님 말씀은 높고 깊고 무한한 말씀입니다. 존경 공경하는 스승 세존님! 스승님이 비유 설명하여 주시는 전륜성왕이란 것을 듣고 보아 이렇게 이해하였습니다.

육신의 서른두 부분 부분이 여래 관자재가 아니라고 올바르게 보고 이해하였습니다.

여기서 잘 보아야 합니다. 전륜성왕이란 비유 설명의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스승 부처님으로부터 비유 설명을 듣기 전에는 수보리 즉 혜안이 열리고 혜명이 된 수보리도 전륜성왕이란 인류 역사 시간 공간 전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그물 감옥을 스스로 올바르게 못 보았던 것입니다. 비유 설명을 듣고 스승 부처님 육신과 자신의 몸 육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육체와 저 깊은 무의식 속에서 동일시되었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여래 관자재가 됩니다.

내 육신은 자아, 무아, 진아, 해탈, 부처가 아니라 그것은 잠시 나타난 그림자 같은 현상 또는 하늘의 구름 같이 온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이 왔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수보리는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보리가 여래(관자재)를 설명한 후에 스승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다시 제자 수보리에게 들려줍니다.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이시 세존 이설게언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이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에 너희들이(수보제와 1250명 그리고 이글을 보는 그대) 과거에 보고 들은 지식과 생각 논리 이론 추론으로 자신의 본성을 발견관하고자 한다면 또는 빛 어둠 시간 공간 삶 죽음 속에서 모양과 형체로 스승 부처의 진체를 보고자하거나 만약에 수보제와 1250명 그리고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네가 자신의 말과 세상 다른 사람들의 말과 글, 온 세상에 있는 소리 속에서 관자재(觀自在) 자아 진아 무아 견성, 해탈, 성불,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발견관하지 못하리라. 또는 부처인 나의 목소리, 나의 말소리를 듣고 나의 진체 법신(관자재)을 찾고 보려고 한다면 영원히 관자재 보는 자를 보지 못 하리라.

위에서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은 깊이 이해 관찰하므로 관자재보살이 어떠한 것인가 올바른 이해가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자, 관자재보살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되었다하는 내용을 스승 부처님이 뒤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반야심경내의 관자재는 스승 석가모니부처님의 육신 내에 존재하는 스스로 보는 자에 대한 설명 표현입니다. 그러하므로 이 반야심경은 부처님 육언 설법인 것입니다.


行深 般若 波羅蜜多時

행심 반야 바라밀다시

이 문장은 네 개의 단어 조합으로 이루어진 실체 설명입니다. 한문과 인도어 혼합으로 이뤄진 참으로 미묘한 문장입니다. 행심과 시는 중국 한문으로 번역된 언어이고 반야와 바라밀다는 인도어 음역과 의역으로

된 문장입니다.


行深 般若 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度

행심 반야 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도

위의문장 내용은 스승 부처님 내면에서 무엇인가 미묘한 관찰을 하고 그 관찰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문자 단어로 기록 표현은 되어 있지만 실상은 문자 단어 너머의 비존재로(非存在) 무(無)와 유(有)가 아닌 실행도 아니고 무위(無爲;아무것도 하지 않는)도 아닌 또 그 중간도 아닌 무엇인가 고정 흐름이 아닌 실상(實相)의 현존적인 표현 기록인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앞부분 관자재보살이란 누구인가? 이를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스승 부처님 내면의 비존재입니다, 즉 이 반야심경 전체 내용은 스승 부처님의 육언이며 제자 사리자에게 들려주는 스승 부처님 본인 내면의 실상을 표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行深 般若 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度

행심 반야 파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도

이 문장 기록물을 보고 이해함에 있어 이 글을 보는 자신의 마음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부처라 가정하고 부처님 입장에서 이 글을 보아야 문자 너머의 의미 실체를 바르게 볼 수 있고 경험과 이해가 따라 올 것입니다. 논리 이론 생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는 설명이며 글이지만 스스로 부처라 가정하고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부처가 아닌 수행자, 제자, 또는 학자, 신자, 숭배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보는 한 이 문자 너머의 실체를 바르게 볼 수 없고 보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行深, (행심) 이 단어와 같은 의미의 단어 문자는 조견(照見)이라 보아야 합니다.

행심(行深), 이 문자 속 의미는 움직임 행동 행위 고정되어 있지 않은 움직임, 살아 있음, 변화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문자 단어입니다. 하지만 실체는 무위, 행함 없는 행위, 집중도 아니고 이완도 아닌 모든 행위가 사라진 미묘한 내면의 현상입니다. 이렇게도 살펴보겠습니다.

이 반야심경 내용을 최초로 구술하는 자가 누구인가? 석가모니, 붓다, 아니면 관자재보살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 이 반야심경을 탐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반야심경을 탐구할 것입니다. 즉 이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란 붓다님 제자가 사리자에게 들려주는 설법, 법문이라 생각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반야심경 내용 어디에도 석가모니 붓다가 설법 설명하고 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문자대로 보면 관자재보살이란 보살, 즉 붓다님 제자가 사리자라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설법처럼 보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많은 혼돈이 발생하였습니다. 조용히 관찰하여 보면 다른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를 호칭하는 단어가 여래, 세존, 불타 등으로 하여 부처라는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반야심경에서는 스승 부처를 호칭하는 내용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관자재보살, 이 단어를 스승 부처님을 호칭하는 단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승 부처님의 제자로 생각할 수 있는 단어 문장입니다. 스승 부처님은 붓다, 즉 부처이지 보살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승 부처님이 자신을 스스로 호칭 표현하면서 관자재보살이라 호칭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치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이 반야심경 내용이 스승 부처님, 즉 석가모니 육성 설법이라면 관자재보살이 바로 석가모니부처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장 기록상으로 보면 스승 부처님 육성이 아닌 제 삼자, 즉 부처님 제자가 사리자라는 제자에게 설법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니 반야심경을 탐구하는데 혼란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은 실존하였던 인간 개인 즉, 남자나 여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 속에 존재하는 보는 자, 관찰자, 눈이란 의미 실체를 중국에서 번역하면서 여러 단어로 번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여기 반야심경 첫머리 관자재보살이란 석가모니 붓다 내면에 있는 현상, 즉 부처님의 눈, 부처님의 관찰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서 눈, 관찰자라는 표현은 불완전 합니다. 有, 無, 존재가 아니라 인간 인식 속에 들어 올수 없는 현상으로

비비존재(非非存在)같은 현상이므로 그리하여 관자재보살이라 표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관자재보살 행심이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승 부처님 본인이 스스로 내면을 고요히 관찰하고 있다, 행위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

般若 波羅蜜多時,(반야 파라밀다시) 이 문장은 세 단어로서 인도어를 음역과 의역을 동시에 한 문장입니다.

반야 바라밀다, 이 단어 문자 속의 의미 실체를 완벽하게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단어는 인도 고어입니다. 그리고 시(時)라는 이 한자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야와 바라밀다, 두 단어 의미를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Praina, 팔리어로는 Panna, 한자로는 般若로서 이 문자 속의 의미는 지혜라고 한국 불교에서는 간략히 해석합니다. 부족한 해석이며 말과 글로는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한 인간 내면의 심오한 현상입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저의 이해를 여기에 문자로 표현한다면 지혜, 반야는 말 글 생각의 범주 안에 포함될 수 없고 지식이나 경험된 인식이 아니며 경험, 기억하는 주체가 사라진 뒤의 현존(나타나는)이기에 지식이나 경험된 인식이 아닌 것이다. 지식과 경험은 그 주체자, 지식을 인지 경험하는 자가 있을 때 형성되고 기억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고정불변의 인식, 경험 체계가 아니라 미묘하지만 이 지혜라는 현상은 그대, 즉 나라는 생각, 마음, 느낌, 에고, 자아 없음 속에서 나타나고 성장한 것이다. 나타남, 성장함이라 표현은 하지만 부족하다. 차라리 꽃 피어 남이 적절하겠다.

이 지혜라는 꽃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 중심으로부터 피어나며 여러 개로 같을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이 지혜는 더 성장하지 않는 완전한 꽃 핌이고 완성이다.

지혜의 완성, 즉 진리라 말합니다.

반야 지혜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성(自性), self nature, 그저 내면 속의 자기 주시, 견성, 마음 지켜보기, 어떤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고 나라는 생각, 나는 사람이라는 생각, 나는 지금 여러 사람 무리 중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태어나 살아 숨 쉬고 살아 있으며 언젠가는 죽을 것이지만 죽고 싶지 않고 오래 살고 싶으며 죽음은 두렵고 무섭다는 생각, 마음의 동일시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는 자로 되었을 때, 그대 내면에서 숨겨져 있는 것이 나타나고 그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 지혜이다. 그것은 항상 개인적이고 독창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영원히 그대의 것이며 오직 그대만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해해야할 것은 그대의 것이라는 이 말은 거기에 어떤 작은 에고(ego)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야 지혜는 그대의 자성(自性), 스스로 보는 자에서 솟아나고 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반야를 그대의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반야 지혜에는 나(自我)라는 에고가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나(자아)라는 에고는 관조, 주시, 지켜봄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반야 지혜라는 꽃은 우주공간 지구위의 현존하는 최고의 더할 수 없는 보물이고 살아있는 영원한 생화(生花)이다.

바라밀다(Paramita,波羅蜜多)

이 단어도 중국에서 번역을 행하면서 음역과 의역을 동시에 한 단어입니다.

바라밀다란 이러한 의미 실체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내면의 현상으로서 무심 무아적인 상태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편견 없이 조용히 스스로 내면을 비추어 보는 상태이다.

바라밀다 차원에서는 체험자 스스로에게 시간 공간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들어간다. 체험자 자신이 언제 어디에 시간 공간이 존재하는지 인식되질 않는다. 시간 공간 나라는 인식 체계가 사라지므로 아상아감(我相我感)이 인식되지 않는다.

시간은 그대 외부에 존재한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대 내면 무아 속에서는 시간 공간 감각이 사라지는 교차점이 있는데 진공 무아 상태이다. 거기에는 영원, 무시간, 무공간이 없는 듯 무존재가 아니라 비존재 한다. 시간 공간 없는 순간, 찰라 지간이 있다.

공간 없고 공간, 시간 감각이 없는 찰라 순간, 이것이 저 넘어 피안의 세계, 바라밀다의 올바른 견해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시간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가 어디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에고, 즉 나라는 생각, 나라는 느낌이 사라지면 우주 전체와 하나 된다. 이때 그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우주 전체 안에서 녹아 없어진다. 공(空)이요, 무(無)요, 영원으로 돌아간다. 이때 반야 바라밀다가 된다.

완성된 지혜 저 넘어 무시간 무공간으로 부터 오는 그것이 반야 바라밀다이다.

그러므로 눈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은 문자나 언어 종교적 차원의 해석이 아닌 스스로 탐구 이해를 바랄 뿐이다.

반야 바라밀다란 또한 두 단어의 조합 같지만 실체는 하나이다.

바라밀다는 뿌리요, 줄기요, 잎이고 반야는 꽃이므로 두 개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현존 실체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차원, 그러한 경험의 순간에 스승 부처님께서 자신의 육체 내면을 보고자 하는 노력 없는 상태에서 조견(照見)하여 보니, 미묘하게 관찰하여 보니 오온개공도(五蘊皆空度)이다. 여기에서 조견 오온개공도는 이글을 보는 당신이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스승 부처님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앞부분 행심(行深)과 조견(照見)을 이해해야 합니다.

行深과 照見,

행심, 문자적으로는 무엇인가 깊이 움직여 행동하였다, 또는 몸속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문자 너머 의미 실체는 반야바라밀다 차원으로 들게 무엇인가 하였다는 의미인데 반야바라밀다에 들기 위해서는 모든 심리적 행위가 사라진 후에라야 되는데 마음의 행위로는 반야바라밀다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행심이란 아무 노력 없이 그저 자신 스스로 모든 마음을 지켜보고 모든 동일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곧 무심, 무아에 들기 위하여 행위 없는 행위, 무위(無爲)를 의미합니다. 이런 후에 반야바라밀다가 이루어진다. 또한 아뇩다라삼막삼보제 발견관적인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가 된 후에, 즉 반야바라밀다시이다.

여기 시(時)라는 이 한글자의 의미는 앞부분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라는 전제 조건 후에 뒤의 것이 성립된다는 의미로 행심 반야바라밀다 차원에서만 조견 오온개공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일반 보통 사람들의 차원이 아니라 스승 붓다의 차원에서 보아야만이 조견 오온개공도 일체고액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곧 여기 반야심경은 일반적인 심리상태로는 이해 체득이 불가능한 기록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바르게만 탐구한다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다.

照見,

조견, 이 단어 문자도 조용히 비추어 본다, 라고 해석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현상이다.

앞의 전제 조건, 행심 반야바라밀다를 득한 후에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조견이다. 照見을 이해하기 위하여 단관(但觀)이란 단어의 의미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 반야심경에서는 중국에서 번역하면서 조견이라고 삼장법사가 번역 기록하였지만 한국의 고승 서산대사께서는 그의 저서 선가귀감에서 이렇게 표현 기록하셨다.

단관 오온 사대무아(但觀 五蘊 四大無我)라고

조견(照見), 이 단어 문자는 누가 말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문자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조용히 비추어 본다, 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여기 반야심경 속에서는 조용히 비추어 본다, 라고 해석한다면 부족하다. 조용히, 란 무엇을 조용히 한다는 의미란 말인가?

여기 조견의 올바른 이해는 참으로 난해합니다. 부처가 되어야만 여기 반야심경에서 표현된 조견이란 의미를 실행할 수 있다.

자신 스스로 내면 모든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본다, 어떤 마음과도 동일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내면을 분별 판단 없이 본다, 볼여는 노력 없이 그저 본다, 라는 의미가 조견이란 올바른 의미이다.

한국 고승 서산대사의 표현을 관찰하여 보면 “단관(但觀) 오온 사대무아“라고 표현 기록한 부분을 ”조견 오온 개공도“와 비교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두 표현이 모두 본다는 의미이지만 보고난 후의 변화를 표현하였다. 반야심경에서는 ”조견 오온 개공도“라고 기록 되었고 서산대사는”단관 오온 사대무아“라고 기록 하였다. 이렇게 비교하여 볼 수도 있다.

반야심경은 중국 삼장법사의 번역이고 한국의 고승 서산대사께서는 자신의 견해로 단관 오온이라 표현하였다. 조견과 단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인도 원어와 스승 붓다의 표현 의미는 단관이 올바를 것이다. 이유는 조견이란 표현 속에는 보고자 하는 노력이 있고 집중이 있다. 또한 보는 자와 대상이 분리된 상태일 수 있다, 하지만 단관은 오직 이완, 보고자 하는 노력 없음 속에서 봄이며 보는 자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五蘊皆空度,

오온개공도,이 단어는 다섯 개의 단어 조합으로 오온, 모두 전부, 없는 듯 있는 텅 빔, 법 제도, 건너다, 라는 단어의 조합이다. 그럼 여기서 오온이란 무엇인가? 반야심경에서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오온이라 하지만 금강경에서는 오온에 해당하는 의미를 찾아보면,


금강경 제 3분 대승정종(大乘正宗), 내용 중에

所有一切 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

소유일체 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

有想, 非無想 我皆令 入無餘涅槃 以滅度之

유상, 비무상 아개영 입무여열반 이멸도지

그대 내면속 에 가지고 있는 모든 인식, 마음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라, 즉 작은 뿌리하나 남기지 말고 변화시켜 건너가라. 금강경 이 부분해석은 제가 번역 출판한 금강경을 참고하세요.


오온(색, 수, 상, 행, 식, 금강경의 중생지류)은 실존이 아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실체가 아니듯 모든 사람은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 오해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스스로 조견, 단관 하는 길 밖에 없다.

조견 오온개공도(색, 수 상, 행, 식, 중생지류), 스스로 속에서 봄으로 그 모두가 그림자 같은 허상이라는 것을 보고 벗어나게 된다. 오직 이 길 밖에 없다!

一切苦厄,

일체고액, 스스로 속에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과 종류를 보고 이해하여 그것으로부터 해방 된다, 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럼 모든 고통의 원인과 종류는 무엇인가?

고액의 원인과 종류가 바로 오온이라는 것이다. 오온과 스스로 동일시되어 있으므로 모든 고통이 항상 있으며 그 동일시로부터 벗어날 때에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개공도(皆空度)이고, 이 개공도가 바로 아누다라삼막삼보리 발견관이다.

반야심경 전체 내용이 지향하는 목적지가 바로 “득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이다.

조견 오온개공도, 이 문장을 읽을 수 있고 의미를 논리적으로 해석한다고 조견 개공도를 득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내면 속에서 오온을 실제로 보아야 한다. 색온이라는 의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일반 보통사람의 이해 능력으로는 이 오온을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行深 般若 波羅蜜多時 차원의 순간에 보아야 보이는 것이다.

一切苦厄,

고액은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일체(一切)를 여기서 살펴보면 이 단어 一切도 참으로 미묘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일체라 볼 수도 있고 일절이라 볼 수도 있다.

일체는 모두 전부라는 의미이고 일절은 모두 자른다, 절단한다, 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각자 개인 속에 없는 듯 있는 괴로움, 고통의 원인을 스스로 보아 동일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舍利子,

사리자, 스승 부처님 제자 이름인데 문맥상 왜 여기서 사리자! 하고 있는가?

잘 관찰하여 보면 사리자 앞과 뒤의 문맥과 의미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리자, 라고 호칭 기록된 의미는 이러 합니다. 앞부분 내용은 사리자의 의식이 사라진 무아, 무심의 상태이지만 여기 사리자, 라고 호칭하는 이유는 무심, 무아에서 벗어나 외부로 나오라, 그리고 외부를 관찰하라는 의미로 사리자를 호칭합니다.

그런 연고로 다음 문장을 보면,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문장은 각자 개인 내면에 있는 오온, 즉 마음이란 고통과 재앙을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 설명을 한 부분입니다.

색수상행식의 오온(또는 금강경 속의 소유일체 중생지류 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을 사람 마음, 외부에 있는 빛과 색, 어둠과 빛, 또는 시간과 공간 현상을 비유하여 오온을 이해하라고 스승 부처님이 사리자에게 설명하여 주는 부분입니다. 뒤의 문장을 보면 보입니다.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오온 또한 이와 같다,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 부분을 설명하기 전에 공즉시색을 먼저 살펴보면 이 부분은 많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현 한국 불교에서 이 부분을 기록하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기이다. 즉 공즉색하고 띄우고 수상행식이라 기록하면 잘못이다. 오온, 즉 색수상행식은 한 묶음인데 색과 수상행식을 분리하여 기록함은 오류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수상행식 역부여시로 기록하여야 올바를 것이다. 왜 그러한가를 이제 살펴보면,

色不異空,

색불이공, 색과 공은 다르지 않다, 즉 색과 공은 동일하다. 또는 색과 공은 분리가 아닌 하나 이다, 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그럼 색은 무엇이고 공은 무엇인가?

먼저 색이란 흰색, 검은색, 빨강색, 노란색, 청색 ,등 특정한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이 색들은 빛없이는 나타날 수 없다. 그렇다고 빛을 흰색이나, 검은색이나 빨강, 노랑이라 보지 않는다. 빛은 빛이고 색은 색이다, 라고 우리 인간은 인식한다.

고요한 마음, 조용히 지금 그대 주변의 형상들 속에 있는 색을 관찰하여 보시라!

색이란 무게, 맛, 촉감, 향기, 소리가 있는가?

색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사람들은 색을 보지만 색의 실체는 보지 못한다. 예로서 노랑, 빨강, 흰색의 올바른 정의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각 색의 시작과 끝, 소멸은 어디인가?

색은 존재하지만 그 색의 실상에 대한 완전항설명은 불가능 하다.

또한 빛, 어둠, 대비 빛의 실체를 우리는 보지 못한다. 빛이 어느 대상에 비추어질 때 인지한다. 대상이 없는 빛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것이 공(空)이다.

여기서 色과 空을 서로 비교하고 있다. 또한 空이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空에 대한 생각 이해는 하늘, 허공, 사물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空이라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오해이거나 여기 부처님의 말씀 속 空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空을 이런 측면으로 관찰해 보면,

공은 유(有)인가, 무(無)인가?

공에 무게 또는 부피가 있는가?

공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가?

공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공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공은 어둠인가, 빛인가?

공은 음양이 있는가? 공은 움직이는가? 공은 정지인가? 생멸하는가? 위의 물음에 답은 있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가? 아니면 모두를 포함하는가?

여기 스승 부처님이 표현하였다. 공에 대한 실체는 인간 논리, 생각으로는 담을 수 없고 표현될 수도 없는 미묘한 비존재, 유, 무의 존재도 아닌 표현 불가, 라 보고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정지, 무심, 무아 같은 것일 것입니다.

空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빛과 색의 실상으로 비유하였고 또한 빛과 색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空을 비유하여 상대적으로 비추어 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照見 五蘊皆空度, 오온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하여 보니 빛과 색 같이 모두가 텅 빈, 空 같음을 보고 오온의 동일시에서 벗어났다. 또한 사리자여! 오온 색수상행식은 색과 공, 공과 색이 같으므로 공과 색수상행식과 같다, 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수상행식으로 기록하여야 올바를 것입니다.

五蘊,

오온, 즉 색, 수, 상, 행 식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오온이란 색, 수, 상, 행, 식을 오온이라 하며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panca-skandha이고 팔리어로는 panca-khandha이라 하며

오음(五陰), 다섯 개의 그림자, 오중(五衆), 다섯 개의 무리, 오취(五取), 다섯 개를 취하였다, 라고 한다.

色蘊

색온은 인도어 rapa-skandha로 불교용어 사전에서는 빛(色)은 스스로 생멸 변화하고 또 다른 것을 장애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 마음속, 즉 염(念)과 상(相) 의식 속에 빛과 색으로 인식된 형상으로 오온 중, 가장 원초적이고 깊이 스며든 현상이 色蘊이다. 사람의 마음 의식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탄생과 더불어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 색온이다.

즉 빛과 어둠, 또는 색상인식은 탄생의 순간에 만들어져 죽음 직전까지 소멸되거나 변하지 않고 내면에서 작용한다. 또한 위의 수상행식 모두가 이 색온에 기초하여 생성되어 간직된다.

受蘊

수온은 불교사전에서는 고통, 즐거움, 불고불락을 느끼는 마음 작용, 또는 受는 받아들인다는 뜻과 낙사를 감수하는 정신작용으로 6식(識) 6경(境)이 접촉함에 생기는 6수(受)의 덩어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제가 보는 수온은 이러합니다.

한자 受(수), 이 글자는 높은 곳에서 건네는 것을 아래에서 받는다는 의미인데 그럼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내려준다는 것인가? 여기 누가라는 것은 먼 과거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필요한 사항들, 즉 사는 방법으로 불과 물의 사용법이라든지 집과 옷, 먹는 것,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 등에 관하여 지식으로 교육 전수되는 것과 또는 선악, 잘하고 못함, 좋고 나쁨, 도덕, 예의, 학문, 예술 등 인간의 과거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던 지식적 내용들이 새로 태어난 사람에게 주입 교육으로 받아들여진 기억 마음을 수온이라 한다. 또한 슬픔, 고통, 즐거움 등과 같은 울음, 웃음 등이 포함되며 사람 마음 의미 속에 그림자처럼 또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는 상태를 수온이라 한다.

想蘊

상온, 불교 사전적인 의미는 사람에게 사물을 상상(想像)하는 선악, 사(邪), 정(正)의 온갖 정상(情想)이 있다. 이것을 통 털어 말함이라 기록되어 있다. 오온을 다섯 개의 형상이라 하지만 실상은 분류된 다섯 개의 현상(現相)이 아니라 서로 즉 색, 수, 상, 행, 식이 서로 엉키고 설켜 분류하기 어려운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온을 하나씩 분류된 객체로 본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그런 연고로 상온은 앞의 색, 수의 작용으로 염(念)과 상(相)의 혼합 현상이다. 한자 想(상)을 잘 살펴보면 생각할 상으로 생각이란 生(생)의 움직임(覺), 자세히 관찰하여 이해한다는 의미, 즉 念과 相의 움직임 작용을 상온이라 한다. 예를 든다면

상온은 색온과 수온이 기초가 되어 작용하여 형성된다, 즉 아름다움 색상이라는 의미는 아름다움이란 수온과 색상이란 색과 빛의 인식이 혼합된 인식 작용인 것입니다. 빛과 색상은 원래 아름답거나 추한 것이 아니라 수온, 즉 과거로부터 전달 학습된, 인식된 지식이 된 念과 相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이 상온으로 된 것이다.

行蘊

행온, 불교 사전적인 의미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samskara-skandha이며 행(움직임) 聚集(취집), 인연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종류대로 모아서 한 뭉치를 이룬 것, 유위법, 곧 오온은 모두 이 뜻이 있으며 행온 가운데는 다른 4온 보다 이 조작(造作) 천류(遷流)하는 行의 뜻을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특히 行蘊(행온)이라 한다. 설 일체유부에서는 46心所(심소)에서 受想(수상)을 제한 44와 불상응법 14를 합한 58법을 총칭하여 행온이라 한다. 이것이 불교 용어 사전적인 행온 설명이다.

행온이란 위의 색, 수, 상온을 원인으로 하여 행하여지는 현상이다. 한 예로 펜을 들고 글을 쓴다고 할 때 그 행위 형상은 색과 수를 기반으로 상, 생각이 함께하여 글을 쓰는 행위가 행온인 것이다.

걸음, 먹고 자는 것, 일하는 것, 얼굴 표정 등 모든 움직임은 색, 수, 상, 행의 연결로 나타나는 것이다.

識薀

식온, 인도어로는 vijana-skandha 로서 불교 용어 사전적인 의미로는 외계에 대하여 사물의 총상을 식별하는 마음의 본체, 이것이 사전적인 의미이다. 識薀(식온)이란 앞의 4온, 색, 수, 상, 행의 결과로 인식 분별하는 기억적, 염상(念相)적인 현상이다.

위에서 오온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다시 살피면 금강경의 제 3분에서의 소유일체 중생지류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간단한 표현으로 한다면 사람 내면의 모든 마음 생각을 오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수상행식 역부여시,

亦復如是,

역부여시, 여기서 역부여시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부분 색불이공에서 공즉시색수상행식의 내용 의미와 뒤에 오는 의미와 실체가 같다. 앞부분은 사람 외부에 있는 빛, 색과 공을 비유하여 내면의 색수상행식을 이해하라고 비유적으로 사리자에게 들려주는 설명인데 이 설명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다시 반복적으로 설명하여 주기 위하여 앞의 설명과 같은 이치로 뒤의 설명을 보고 이해하라는 의미가 바로 역부여시입니다.
2013-06-12 15: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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