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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운의 漢字 이야기 – 管鮑之交(관포지교)
안종운  |  한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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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05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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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운  한자신문

<저작권자 © 한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 친구(親舊) 사이의 두터운 우정(友情)을 비유(比喩)하는 말이다.

천자문(千字文)의 지은이 종요(宗要)가 효렴제도(孝廉制度)에 의 관리(管理)로 선발(選拔)되어 드디어 궁궐(宮闕)에 입성(入城)한다. 화려(華麗)한 궁궐(宮闕) 모습을 보고 난 이후 지난 관리(官吏)들의 행적(行跡)에 관(關)하여 살펴본다.

여기에 “환공광합(桓公匡合)하고 제약부경(濟弱扶傾)”이란 글이 나온다. 글자 그대로 해석(解釋)하면 ‘환공(桓公)은 바로잡고 규합(糾合)하여’, ‘약(弱)한자를 구제(救濟)하고, 기우는 나라를 구제해 주었다’는 글귀로 춘추시대(春秋時代) 오패(五霸)중의 하나인 제나라 환공 소백의 치세(治世) 경륜(經綸)을 말하고 있다.

제나라 환공이 있기 까지는 마땅히 우정의 바이블 이라고 할 수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공로(功勞)라는 등식(等式)이 성립(成立)한다.

일반적(一般的)인 관중과 포숙아의 사귐이라는 기존의 의례적인  내용(內容)에 추가(追加)하여 당시(當時)의 여건등, 주변상황(周邊狀況)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 있도록 고사성어(故事成語) 대사전(大辭典)에서 발췌(拔萃)한 내용을  이야기 차원으로  다시 실어본다..

제(齊)나라는 본래 주(周)나라 창건의 일등 공신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즉 속칭 강태공(姜太公)이 봉해진 나라로,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왔다.

희공(僖公)은 이른바 강태공으로 부터 13대째 인데, 그에게는 제아(諸兒), 규(糾), 소백(小白) 등 세 아들이 있었다. 태자(太子)인 큰아들 제아가 왕위(王位) 계승자(繼承者)였다.
그런데 제아는 자기(自己) 친누이인 문강과 패륜행위를 하고 있는 사실(事實)을 우연한 기회(機會)에 동생 소백이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백은 패륜적(悖倫的)인 형(兄) 제아를 제거(除去)하고 자기가 왕위를 차지해야겠다고 결심(決心)하였다.
이 즈음 둘째 아들인 규의 스승이 은퇴(隱退)하자 포숙이 규에게 관중(觀衆)을 추천(推薦)했고, 관중은 규를 섬기게 되었다. 이로써 관중과 포숙은 각각(各各) 규와 소백을 섬기게 되었다.

희공이 죽고 장자인 제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양공(襄公)이다. 양공 즉위 4년에 노(魯)나라로 시집갔던 문강이 남편과 함께 제나라로 근친(覲親)을 왔다.

1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다시 사련을 불태웠다. 그런데 문강의 남편(男便)이 이를 눈치 채고 뒷조사를 하여 그들의 불륜(不倫) 관계(關係)가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나게 되었다. 문강의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문강을 죽이려고 했다.

문강은 오빠에게 달려가 살려 달라고 애원(哀願)했다. 양공은 완력(腕力)이 뛰어난 그의 아들 팽생을 시켜 문강의 남편을 죽이도록 했다. 팽생은 문강의 남편을 끌어안는 척하면서 늑골(肋骨)을 부러뜨려 죽이고, 노나라(魯나라) 사람들에게는 급질(急疾)로 죽었다고 통보(通報)했다. 하지만 노나라에서는 주군의 사인이 늑골 골절(骨折)에 있음을 확인(確認)했고, 범인(犯人) 팽생의 처벌(處罰)을 요구(要求)해 왔다.

양공은 팽생에게 죄(罪)를 뒤집어 씌워 죽여 버리고 말았다. 양공은 누이동생 문강을 제나라에 머물게 하고 불륜을 계속(繼續)했다. 사생활(私生活)이 문란(紊亂)해지니 정치(政治)도 그에 따라 문란해졌다.

왕(王)은 포악무도(暴惡無道)했으며, 법령(法令)이 제대로 서지 않고 간사(奸邪)한 무리가 판을 쳤다. 이렇게 되자 공자 규와 소백도 자신(自身)들의 안전(安全)을 염려(念慮)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규는 관중과 함께 노나라로 피했고, 소백은 포숙과 더불어 거(莒)나라로 망명했다.
양공을 원망하는 신하들이 자꾸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양공을 가장 원망한 사람은 양공의 사촌 동생 무지(無知)였다. 희공이 살아 있을 때 희공은 동생 이중년(夷中年)을 아주 아꼈는데, 이중년이 일찍 죽자 그의 아들 무지를 태자와 똑같이 대우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물론 규와 소백은 아버지의 이런 처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제아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사촌 동생 무지에 대한 대우를 폐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무지는 사촌 형 양공에 대해 매우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무지는 비밀리(祕密裏)에 불평분자(不平分子)들을 모았다. 마침 교체(交替)를 해 주지 않는 것에 불만(不滿)을 품고 반란(叛亂)을 계획(計劃)하던 국경(國境) 수비대장(守備隊長)들이 양공의 정치(政治)가 날로 포악(暴惡)해지자 급기야(及其也)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무지(無知)를 앞세워 궁중(宮中)에 침입(侵入)하여 다락방 속에 숨어있는 양공을 찾아내어 죽여 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무지가 제나라의 왕(王)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경영(經營)할 만한 능력(能力)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亦是) 양공(陽孔)처럼 포악무도(暴惡無道)하게 정치를 하다가 많은 사람에게 원한(怨恨)을 샀고 왕이 된 지 수개월(數個月) 만에 살해(殺害)되고 말았다. 제나라(齊나라)에는 권력(權力)의 공백(空白) 상태(狀態)가 찾아왔다. 이로부터 제나라 주인(主人)의 자리를 놓고 규와 소백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시작(始作)되었다.

노나라에 있던 규는 관중을 군사(軍師)로 삼아 귀국(歸國)을 서둘렀고, 거나라에 있던 소백은 포숙을 군사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다.

소백이 망명(亡命)해 있던 거나라는 제나라의 국경(國境)에서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규보다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당도(當到)하리라는 것을 계산(計算)에 넣고 있었던 관중은 별동대(別動隊)를 이끌고 소백이 귀국하는 길목에 미리 가 매복(埋伏)을 했다. 소백이 눈에 들어오자 관중은 활시위를 당겼고, 시위(示威)를 떠난 화살은 소백의 배에 명중했다.

소백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관중은 이 사실을 노나라에 있는 규에게 보고했고, 규는 제나라의 주인이 다 된 기분으로 느긋하게 귀국했다.그런데 관중의 활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백은 다행히도 화살이 허리띠의 쇠고리에 맞는 바람에 죽지 않았다.

그는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말에서 떨어져 죽은 척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제나라에 귀국하여 권좌를 차지하고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환공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사를 풀어 규와 관중 일당을 소탕하고, 규와 관중을 수배했다. 그러자 규가 망명해 있던 노나라도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했지만 전쟁의 결과는 노나라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노나라가 제나라에 화의(和議)를 청(請)하자 제나라에서는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화의의 조건(條件)으로 규를 잡아 죽이도록 요청(要請)했다. 노나라는 할 수 없이 규를 죽이고, 관중까지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제나라 사신이 관중은 자기(自己) 나라 임금을 사살(射殺)하려고 한 사람이므로 자기 임금께서 직접(直接) 처단(處斷)할 것이라고 하면서 관중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관중은 죄수(罪囚)를 압송(押送)하는 함거(轞車)에 실려 제나라로 압송되었는데, 관중은 이것이 자기를 살려 주기 위한 포숙의 계책(計策)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중이 제나라에 도착(到着)하자 포숙이 직접 나와서 맞이하는 것이 과연(果然) 관중이 예상(豫想)했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숙은 환공(桓公)에게 정권(政權)을 잡은 현재(現在) 상태(狀態)에 만족(滿足)한다면 자기로 족(足)하지만, 중원의 패자(敗者)가 될 생각이 있다면 자기만으로는 부족(不足)하다며 관중을 강력(强力) 추천(推薦)했다.

환공(桓公)은 포숙의 추천(推薦)을 받아들여 자신(自身)을 죽이려 했던 관중을 등용(登用)하여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포숙은 기꺼이 관중의 아랫자리로 들어갔다. 환공은 관중을 임용(任用)한 이후(以後) 패자의 지위(地位)를 확보(確保)하였고, 제후(諸侯)들과 9회(回)에 걸쳐 회맹(會盟)함으로서 천하(天下)를 바꿀 수 있었다.

관중이 제나라(齊나라)의 재상이 되어 국정(國政)을 맡자 변변치 못했던 제나라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관중은 바다를 낀 지리적(地理的) 이로움을 살려 해산물(海産物)을 팔아서 나라를 부하게 하여 군비(軍備)를 튼튼히 하였음은 물론(勿論), 항상(恒常) 민중(民衆)과 고락(苦樂)을 같이하였다.

그리하여 영(令)을 내리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민심(民心)이 잘 순응(順應)했다. 나라에서 의논(議論)한 정책(政策)은 백성(百姓)들이 쉽게 행(行)할 수 있었고, 백성이 바라는 것을 나라에서 잘 들어주었으며, 싫어하는 것은 제거(除去)하여 백성들의 불편(不便)을 덜어 주었다. .「후에 관중은 포숙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지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숙은 나를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롭고 이롭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갔다가 매번 임금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次例) 싸웠다가 모두 패(敗)해서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同僚)이던 소홀(疏忽)은 죽고 나는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父母)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천거(薦擧)한 후 자신(自身)은 늘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포숙의 자손(子孫)은 대대로(代代로) 제나라(齊나라)의 녹(祿)을 받고 봉읍을 가지기를 십여(十餘) 대나 하였는데, 항상(恒常) 이름 있는 대부로 세상(世上)에 알려졌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賢明)함을 칭찬(稱讚)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能力)을 더 칭찬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를 가리켜 ‘관중과 포숙의 사귐’, 즉 ‘관포지교’라고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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