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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落葉)이 흩날리는 처인성(處仁城)에서처인성 스토리텔링 공모전(公募展) 수상작품(受賞作品)
안종운  |  한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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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11  17: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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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운  한자신문

<저작권자 © 한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대몽항쟁 - 처인성 전투장면
버스가 용인(龍仁) 읍내(邑內)를 벗어났다. 탁 트인 45번 국도(國道)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던 버스는 원천 교차로(交叉路)에서 진위천을 따라 서쪽으로 방향(方向)을 바꾸었다.

서리 입구(入口)에서 다리를 건너 서리로 들어간 버스는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꾸불꾸불하고 야트막한 야산(野山)을 넘기 시작(始作)하였다. 길은 외길이었다. 맞은편 에서 차(車)가 오면 한 쪽 차는 길가에 비켜서서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싸릿재고개를 넘은 버스는 다시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한동안 내려갔고 완장리를 벗어나면서부터는 탁 트인 들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개천을 따라 달리며 왕림 들판을 지나 윗등림들과 아랫등림들을 지나니 탁 트여진 앞 전망(展望)에 아담(雅淡)한 토성(土城)이 나타났다.

저곳이 바로 처인성 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처인성은 아곡리 마을 앞에 우뚝 서 있었고 처인성 앞 텃밭에서는 나이 드신 농부(農夫) 한 사람이 세월(歲月)의 무상(無常)함을 일깨우려는 듯 혼자 바쁘게 가을배추를 돌보고 있었다.

780여년전(前) 몽고(蒙古)의 살리타이가 이 길을 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버스가 방금(方今) 온 그 산길은 매복(埋伏)의 여지가 많은 긴 계곡(溪谷)이었기 때문에 병법(兵法)의 달인(達人)인 몽고병(蒙古兵)들이 이 길을 넘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홀로 해 보았다.

그럼 살리타이는 어느 길로 처인성을 공격(攻擊)해 왔을까?

아무도 없는 처인성에 올라 토성(土城) 위를 한 바퀴 돌며 사방(四方)을 둘러 보았다. 가을 바람은 무심히 불고 낙엽은 하나둘 흩날렸다.

대제국(大帝國) 몽고의 오고타이 칸은 징기스칸의 유언(遺言)에 따라 금나라를 정벌(征伐)하면서 한 부대(部隊)를 솔롱고스[고려(高麗)]로 파견(派遣)하여 고려를 점령(占領)하고자 했다.

그는 맹장살리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는데 의외의 사건(事件)이 터지고 말았다.

살리타이가 고려의 한 나지막한 성(城)에서 정규군(正規軍)도 아닌 천민집단(賤民集團)으로 구성(構成)된 수비군(守備軍)에 의(依)해 사살(射殺)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은 몽고와 고려에 엄청난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켰다.

몽고는 고려 침공(侵攻)을 중단(中斷)시킨 채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 어떤 나라인지 다시 조사(調査)를 시켰고 강화도(江華島)에 도피(逃避)해 있던 고려 조정(朝廷)은 용기백배(勇氣百倍)하여 몽고에 대한 항전(抗戰) 의욕(意欲)을 부추겼다.

몽고의 오고타이 칸은 고려(高麗) 공격을 뒤로 미루고 전군(全軍)을 집결(集結)시켜 금나라 공격에 전념(專念)하여 마침내 금의 수도(首都)인 변경(變更)과 마지막 항거지(抗拒地)인 채주를 점령함으로써 금을 멸망(滅亡)시킨다.

몽고가 대제국인 금을 멸망시키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금의 변경이 함락(陷落)될 때에는 금나라의 성민들이 50일간(日間) 포위(包圍)된 채 기아(飢餓)와 질병(疾病)에 허덕이며 처자식(妻子息)을 잡아먹는 아비규환(阿鼻叫喚) 끝에 결국(結局) 처참(悽慘)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변경(邊境)의 함락은 전(全) 중국(中國)을 공포(恐怖)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금을 정복(征服)한 몽고군(蒙古軍)은 여세(餘勢)를 몰아 맹장 당올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에 대한 침공을 다시 시작하여 기나긴 고려와의 전쟁(戰爭)을 이어가게 된다.

금나라의 비참(悲慘)한 멸망과 몽고의 재침 소식(消息)을 접(接)해 들은 고려는 금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爲)해 강화(强化)를 청(請)하고 일찌감히 항복(降伏)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살리타이의 1차(次), 2차 침공 때의 귀주성(貴州城), 충주성(忠州城)에서의 방어(防禦)와 처인성에서의 적장사살이라는 성공적(成功的)인 경험(經驗)으로 인해 거대제국(巨大帝國) 금의 멸망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전의(戰意)를 가다듬고 전투(戰鬪)에 임(臨)했던 것이었다.

이는 곧 처인성 전투에서의 승리(勝利)에 대한 고려의 자신감(自信感)의 표현(表現)이었다.

낙엽(落葉)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들이 또 한 번 우수수 떨어지며 흩어진다. 다시 고개를 돌려 처인성 외곽(外郭) 안쪽기슭에 포근히 자리잡은 아곡리 마을을 바라보았다.

그 때 처인성을 지키던 사람들은 처인부곡민(部曲民)들이라고 했는데 처인부곡(部曲)은 아곡리였을까? 아니면 더 위쪽의 완장리 였을까?

왜 그들은 도망가지 못하고 여기 남아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을까?

군대(軍隊)도 다 빠져 나가고 없는 이 텅 빈 토성에 왜 김윤후(金允侯)는 남아서 천민(賤民)들인 부곡민들을 지휘(指揮)하고 있었을까? 토성 안을 둘러 보았다.

지금(只今)은 평화롭기만한 이 땅은 780년전(前)에는 피아(彼我)의 함성(喊聲)이 온 들판을 뒤덮었을 것이었다.

처인성 전투는 귀주성 전투와 더불어 몽고의 고려 침공 초기(初期)에 양측(兩側)의 전세를 결정짓는 중요(重要)한 결정적(決定的)인 사건이었다.

처인성은 평지(平地)에 지어진 군창(軍倉)터였다. 귀주성, 충주성(忠州性) 등(等)과 같이 방호별감(防護別監)과 수비군사(守備軍士)들이 지키는 전략적(戰略的) 요충지(要衝地)가 아니었다.

살리타이의 몽고군이 개경(開京)과 한양(漢陽)을 거쳐 광주(廣州)를 침공하고 있을 때 처인성이 속(屬)한 수주[수원(水原)]를 지키던 방호별감은, 처인성이 군창으로서 요지(要地)이기는 하지만 평지에 지어진 낮은 성(城)이라 군대를 주둔(駐屯)시켜 방어하기에는 문제(問題)가 있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전략적 판단(判斷)으로 수비군사들을 처인성에서 빼내어 인근(隣近) 산성으로 입보를 시켰지만 그러나 또한 적(敵)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는 군창이었기 때문에 정규군 대신(代身) 처인부곡의 백성(百姓)들과 이들을 지휘할 백현원의 승군(僧軍)을 배치(配置)해 두었던 것이다.

만약 처인성에 몽고군이 들이닥치게 되면 가능(可能)한 한 막아 보다가 여차(如此)할 경우(境遇) 모두 서쪽 능선(稜線)을 타고 산으로 도망가라고 지시(指示)하였는지도 몰랐다.

김윤후라는 백현원의 승려(僧侶)가 처인성 방어의 책임자(責任者)였는지 스스로 책임자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처인성에 입보(入保)한 성민들을 지휘하고 훈련(訓鍊)시킨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는 분명(分明) 군사적(軍事的) 지식(知識)과 경험을 가진 자였을 것이다.

그는 몽고의 대병(大兵)이 들이닥칠 경우 몰살당할 것이 뻔한 이곳에서 무언가 선택(選擇)을 해야만 했다.

처인성은 삼면(三面)이 개활지(開豁地)이지만 서쪽 능선 쪽은 함봉산과 무봉산에 이어지는 야산에 연결(連結)되어 있었다. 만약에 대군(大軍)이 덮칠 경우 야산을 타고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김윤후는 처인성을 목숨을 걸고 방어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처인성에 입보해 있던 처인 부곡민들 역시(亦是) 김윤후와 같이 결사적(決死的)으로 지킬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농사꾼으로 이루어진 이 훈련되지 않은 백성들이 몽고의 대군과 맞붙어 싸웠을 리가 없는 것이다. 충분히 도망갈 수도 있는 전투에서 무엇이 그들을 결사(決死)의 항전으로 싸우게 만들었을까?

처인성 앞 텃밭에서 배추를 손보던 농부가 짐가지와 농구를 챙겨들고 일어섰다.

그는 무엇이 바쁜지 종종걸음으로 아곡리 쪽으로 걸어갔다. 아곡리로 가는 오솔길에는 농부 외(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고즈넉한 풍경(風景)이었다.

처인성을 지키던 사람들은 처인부곡민들이었다. 부곡이란 천민들이 집단(集團)을 이루어 살던 행정구역(行政區域)이다.

이들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나라에서 부과(賦課)되는 세공을 바치고 부역을 하며 고려의 정상적(正常的)인 백성으로 살았지만 모든 면에서 양민(良民)들과는 차별적(差別的)인 대우(待遇)를 받고 있었다.

부곡민들은 형벌상(刑罰上) 노비(奴婢)와 동등(同等)하게 취급(取扱)받았다.

자식(子息)을 낳아도 천인(賤人)으로 세습(世襲)이 되었고 과거(過去)에 응시(應試)할 수 없었으며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禁止)되었다.

그 이유(理由)는 이들 혹은 이들의 조상(祖上)들이 과거에 전쟁포로(戰爭捕虜) 집단이었거나 반역(反逆)에 가담(加擔)했거나 중대(重大)한 범죄(犯罪)를 저질렀었기 때문이었다.

몽고와의 전쟁이 끝난 후(後) 처인부곡은 처인현(縣)으로 승격(昇格)된다. 즉(卽) 마을 백성 모두가 천민에서 양인(良人)이 되는 것이었다.

엄청난 혜택(惠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결과(結果)들을 보면 김윤후가 어떻게 이들을 훈련시켰으며 이들이 왜 김윤후를 따라 몽고의 대군과 싸우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程度) 짐작(斟酌)을 할 수가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삶에 희망(希望)이 없는 것인지는 누구보다도 본인(本人)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천민을 벗어나는 길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덤벼들 것이었다.

김윤후는 처인부곡민들의 한 맺힌 그것을 노렸다. 그는 분명 부곡민들을 모아 놓고 지금 그들에게 닥쳐온 위기(危機)를 일생일대(一生一大)의 절호(絶好)의 찬스로 바꾸자고 외쳤을 것이었다.

“여러분은 이 기회(機會)를 놓치면 평생(平生) 다시 오지 않는다.

천민의 굴레를 벗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산으로 도망(逃亡)하였다가 평생 자손(子孫) 대대로 다시 천민으로 돌아올 것이냐?

천민의 굴레를 벗고 양인(良人)이 되어 떳떳하게 어깨 활짝 펴고 살아갈 것이냐? 이 갈래길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자, 어떻게 할 것이냐?”

인간(人間)에게 엄청난 고통(苦痛)을 안겨 주고 모든 기득권(旣得權)들을 파괴(破壞)해 버리는 전쟁이나 환난(患難)은 때로는 그와 더불어 어느 때보다 혁신적(革新的)인 사회변혁(社會變革)을 동반(同伴)하기도 한다.

몽고의 때와 장소(場所)를 가리지 않는 침략전쟁(侵略戰爭)은 고려 사회(社會)에도 보이지 않는 변화(變化)의 바람을 몰고 왔던 것이다. 처인부곡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인성의 남쪽과 북쪽에는 낮은 구릉(丘陵)이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김윤후는 양쪽 구릉에 목책(木柵)을 세웠을 것이었다.

처인성의 북쪽 구릉은 지금도 사장터라 불리운다고 한다. 사장이란 새장을 얘기하는 것일 것이며, 새장이란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의하면 목책의 순(純)우리말이다.

지형적(地形的)으로 보아도 처인성만 홀로 지키기에는 너무 불리(不利)했다. 분명 남쪽과 북쪽에 있는 구릉에 목책을 세워 이중 방어선(防禦線)을 만들었을 것이었다.

처인성에서 북쪽과 남쪽을 보면 구릉이 앞에 있어 시야(視野)가 가로막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윤후가 이 지형(地形)을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그 증거(證據)로 사장터라는 우리말 이름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양쪽 구릉의 목책과 처인성에 화살 부대를 배치하면 동쪽, 남쪽, 북쪽이 모두 개활지이기 때문에 접근(接近)해 오는 적들 모두가 사정거리(射程距離) 안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반면 공격해 오는 입장(立場)에서는 성과 목책에 몸을 숨긴 채 화살을 쏘는 성민들에 대해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는 공격하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김윤후는 짧은 기간(期間) 동안 부곡민들에게 집중적(集中的)으로 활을 쏘는 훈련을 시켰다.

기마병(騎馬兵)들이 빠른 속도(速度)로 공격해 올 경우를 대비(對備)해 적절(適切)한 시점(時點)에 화살을 날리는 훈련을 시킨 것이다. 문제는 과연(果然) 몽고군들이 처인성을 공격해 올까 하는 것이었다.

살리타이는 고려를 침공한 첫 몽고장수이다. 금나라를 침공하던 몽고의 대군에서 한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빠져 나와 금나라의 배후(背後)에 있는 고려를 치러 국경(國境)을 넘었던 살리타이는 국경을 넘자마자 고려가 보통(普通) 나라들과는 다르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바로 느꼈었다.

첫 번 째 전투인 고려의 철주성에서는 기세(氣勢) 좋게 함락시켰지만 그 뒤 귀주성과 자주성, 충주성에서는 치열(熾烈)한 공방전(攻防戰) 끝에 의외로 함락을 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특히 귀주성 전투에서는 이제까지 몽고군들이 가지고 있던 온갖 공성전법(攻城戰法)을 다 동원(動員)하였어도 박서, 김경손 장군(將軍) 등이 이끄는 고려군(高麗軍)들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살리타이는 작전(作戰)을 바꾸어 평야(平野) 지대(地帶)에 있는 마을들을 도륙(屠戮)하며 휩쓸어 내려갔다. 그리고 개경을 포위하고 왕(王)을 압박(壓迫)하여 고려군들의 항복을 받아 내고는 돌아갔던 것이었다.

몽고군들은 고려에 항복을 받아 내었어도 오래 주둔할 수가 없었다.

언제 어느 때 고려군들이 기습(奇襲)해 올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몽고군들은 날쌘 기병(騎兵)으로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치고 빠지는 기동작전(機動作戰)의 명수(名手)들이었다.

몽고군(蒙古軍)들이 물러가자 개경의 무신정권(武臣政權) 실권자(實權者) 최이는 왕을 움직여 강화도로 천도(遷都)를 감행(敢行)한다.

공식적(公式的)으로 몽고와의 항전을 천명(闡明)한 것이었다. 전국(全國)의 산성과 해도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입보시키고 항전태세(抗戰態勢)를 갖추게 하였다.

몽고가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살리타이는 지체(遲滯)하지 않고 다시 고려를 침략(侵略)해 들어왔다.

살리타이의 선발대(先發隊)는 전광석화와 같이 전국을 유린(蹂躪)하며 대구(大邱)까지 내려가서 분탕질을 쳤다.

살리타이는 본대(本隊)를 이끌고 개경과 한양을 점령한 후 광주성을 쳤다. 그러나 광주부사 이세화의 활약(活躍)에 의해 광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살리타이는 광주성을 지나쳐 충주성을 치기 위해 남하(南下)하기 시작하였다.

처인성은 광주에서 수주로 남하하는 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처인성은 군사적 요지(要地)에 위치한 군창(軍倉)의 특성상(特性上) 대로상(大路上)에서는 약간 후미진 곳에 있는 숨겨져 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지리(地理)를 잘 모를 경우 지나치기 좋은 그러한 곳이었지만 몽고군 내(內)에 있던 항복한 고려 관리(官吏)에 의해 제보(提報)가 되었던지 살리타이는 군대를 처인성으로 돌렸던 것이었다.

때는 혹한(酷寒)의 12월(月)이었고 군대는 굶주렸을 것이며 군량미(軍糧米)가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했을 것이다.

근처(近處)에 군창이 있다는 정보(情報)를 접했을 것이고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천민들이 활을 들고 지키고 있다는 정보도 알아내었을 것이다.

몽고군은 정보전(情報戰)의 명수이고 심리전(心理戰)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전투를 개시(開始)하기 전 항상(恒常) 먼저 항복한 군인(軍人)이나 관리를 보내 항복을 권(勸)하고 항거(抗拒)를 할 경우 어떤 무자비(無慈悲)한 대가(代價)를 치르는지를 알려주어 수비(守備)하는 쪽에 공포심(恐怖心)을 심어 주었다.

분명히 처인성에도 그런 절차(節次)를 밟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 조그만 토성에서 산천초목(山川草木)도 벌벌 떠는 몽고군에게 항전의 의지(意志)를 보이자 기가 찼을 것이었다. 살리타이는 일거(一擧)에 이 토성을 휩쓸어 버리기로 한다.

김윤후는 성과 목책을 다니며 위치를 잡았다.

가장 활을 잘 쏘는 명사수(名射手)들을 목책의 맨 앞에 배치시키고 이리저리 다니며 활시위을 당기는 시점을 잡아 주었다. 모두들 김윤후의 사격(射擊) 명령(命令)이 떨어지지 않으면 활을 쏘지 않았다.

살리타이는 방심(放心)하였음이 틀림없었다.

이 조그만 군창은 높은 산을 의지(依支)한 견고(堅固)한 산성도 아니었고 수비병(守備兵)들 또한 훈련받은 정규군이 아니었고 오합지졸로 보이는 비정규군(非正規軍)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광주성을 함락하지 못한 분풀이를 이곳에서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살리타이는 몽고 기병들과 함께 처인성을 향(向)해 말을 달리다가 갑자기 우박(雨雹)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洗禮)를 맞고 전사(戰死)해 버리고 만다.

대장(大將)을 잃은 몽고병들은 우왕좌왕(右往左往)하였으며 부곡민들은 목책을 나와 도망가는 몽고병들을 참살(慘殺)하고 사로잡았다. 몽고군들은 우두머리가 죽으면 일단(一旦) 모든 군사행동(軍事行動)을 중지(中止)하고 후퇴(後退)한다.

그들은 썰물처럼 물러가 버렸다. 처인성을 지키던 승군들과 처인부곡민들 그리고 김윤후가 뜻밖의 승리에 가슴 벅찬 환호(歡呼)를 하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살리타이가 죽자 부장인 티커는 몽고의 본대는 이끌고 철수(撤收)하여 압록강(鴨綠江)을 넘어 돌아가 버렸다. 그들은 물러가는 속도 또한 빨랐다.
 

처인성 승전(勝戰) 후 강화에 있는 행궁(行宮)에 불려간 김윤후는 왕이 살리타이를 사살한 공로(功勞)를 치하(致賀)하자,

“아닙니다. 저는 그저 지시만 하였을 뿐 활과 화살은 잡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을 보면 그는 바쁘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전황(戰況)을 파악(把握)하고 곳곳의 문제점(問題點)들을 해결(解決)하며 총괄적(總括的)인 지휘통제(指揮統制)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쪽 남사면 쪽으로 난 좁고 긴 오솔길을 한 여인(女人)이 베낭을 메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따금씩 승용차(乘用車)들이 오고 갈 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는데 화사(華奢)한 색깔(色깔)의 옷을 입은 사람을 보니 반가웠다.

여인은 처인성을 돌아 아곡리 마을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 버스를 타고 큰 길에서 내려 이곳까지 걸어서 온 모양이었다. 이곳은 아직도 큰 버스들은 들어오지 않는 후미진 곳이었다.

그 여인은 마을 안으로 사라졌다. 저 여인은 처인부곡민의 후예(後裔)일까? 아니 처인현민(縣民)의 후예일까? 그녀의 조상 중 한 할아버지께서 강인(强靭)한 팔로 활시위를 끌어당겨 살리타이를 명중시켰을까?

살리타이가 고려의 한 시골에서 그의 무인(無人)의 인생(人生)을 마치고 있을 때, 오고타이 칸이 거느리는 몽고의 대군은 금나라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오고타이는 금에 대한 공략(攻掠) 현장(現場)에 몽케, 쿠빌라이 등 몽고 제국(帝國)의 후계자(後繼者)들을 모두 거느리고 있었다. 살리타이의 부장 티커가 칸 앞에서 부복하여 고려 정벌군(征伐軍)의 총대장(總大將) 살리타이의 전사를 알렸다.

오고타이는 경악(驚愕)했을 것이었다. 몽고의 고려 침공은 이들이 금 제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미루어진다.

몽고가 당올타이[唐古]를 보내 고려를 세 번째 침공하는 것은 그들이 금을 멸망시키고 몽고 초원(草原)에 제국의 수도인 캐라코룸을 건설(建設)한 다음이었다. 그만큼 살리타이의 전사(戰死)는 몽고에게 충격(衝擊)을 안겨다 준 것이었다.

중국 전선(戰線)에서 오고타이 칸을 따라 종군(從軍)하고 있었던 쿠빌라이에게 있어서 고려에 대한 인상(印象)은 매우 강렬(强烈)하게 전달(傳達)되었다.

그는 중국 문화(文化)에 반해 있었으며 중국에 대해 공부(工夫)하면서 자연적(自然的)으로 고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군사적인 부분(部分)에 매우 관심(關心)이 많았던 쿠빌라이는 중국의 수양제(隋煬帝)가 백만(百萬)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도 고구려(高句麗)를 이기지 못하였고 당태종(唐太宗)이 수차례(數次例) 전 중국의 병력(兵力)을 몰아 고구려를 침입(侵入)했어도 이기지 못하였다는 사실(事實)을 알아내었다.

지금도 몽고군들이 고려를 휩쓸어 버리지 못하고 고려 경내(境內)에서 승전과 패전(敗戰)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도 고려가 만만치 않는 나라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 매우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된다.

이로부터 30여년 후, 몽고가 금 정벌을 끝내고 남송(南宋)을 한창 공략하며 고전(苦戰)하고 있을 때 동쪽 고려 전선(戰線)에서도 역시 힘든 전투를 계속(繼續)하고 있었다.

남송을 공략 중이던 몽케 칸이 죽자, 몽고 제국의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다.

몽케의 동생인 쿠빌라이는 당연히 자신(自身)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캐라코룸을 지키고 있던 막내 동생 아리부카가 많은 지지(支持)를 얻으며 칸으로 즉위하였다.

중국 전선에 있던 많은 몽고의 대장(隊長)들도 아리부카를 지지하는 자(者)들이 많았다. 쿠빌라이는 모든 전투를 중단하고 제위(帝位)를 빼앗길까 하는 불안(不安)한 마음으로 군사를 돌려 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때 거듭되는 몽고의 침구에 피폐(疲弊)해 질대로 피폐해 진 고려에서는 드디어 강화도를 나와 항복하기로 결정(決定)하고 태자(太子)인 전을 몽고 황제(皇帝)에게 항복 사절(使節)로 보내게 된다.

중국에 도착(到着)한 태자는 몽고 황제가 죽고 후계자가 아직 결정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쿠빌라이와 아리부카 둘 중 한 명(名)을 선택하여 빨리 고려 조정의 의사(意思) 전달을 해야만 했다. 의사결정(意思決定)을 빨리 해야 고려 백성들의 도탄(塗炭)과 전쟁의 아비규환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태자는 과감(果敢)하게 쿠빌라이를 선택한다.

그리고는 수도에서 기다리지 않고 쿠빌라이가 올라오고 있는 도중(途中)으로 달려가서, 데리고 간 군신(君臣)들과 함께 길가에 도열하고 서서 정상적인 외교(外交) 절차에 따라 차기(次期) 몽고황제(蒙古皇帝)에 대한 예의(禮儀)를 올린 것이었다.

이 때 쿠빌라이가 얼마나 감격(感激)하였는지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말해주고 있다.

“고려는 만리 밖의 나라로 당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어도 굴복(屈服)시키지 못하였는데 이제 세자(世子)가 몸소 왔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즉 고려의 세자가 직접(直接) 와서 자기(自己)를 몽고 황제로 인정(認定)하였으니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후(以後) 쿠빌라이는 5년여에 걸친 권력투쟁(權力鬪爭) 끝에 동생인 아리부카를 완전히 제압(制壓)하고 명실공히 몽고의 칸으로 올라서게 되지만 이 당시(當時) 절박(切迫)한 상황(狀況)에서 맞이한 고려 세자는 너무나도 반가운 손님이었던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고려에 대해서는 다른 정복국가(征服國家)와는 달리 번왕에 준(準)한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된다.

번왕의 예우(禮遇)란, 고려의 모든 강역(江域)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몽고군대(蒙古軍隊)를 고려 땅에서 완전(完全) 철수시키며 고려의 자체적(自體的)인 복식(服飾)이나 제도(制度) 역시 그대로 인정해 주고 간섭(干涉)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려가 몽고에 복속(服屬)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최소한(最小限)의 정치적(政治的) 독립성(獨立性)을 유지(維持)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고의 일방적(一方的)인 침입에 대응(對應)하여 50년 이상(以上) 군사적 혹은 외교적(外交的) 대응을 지속(持續)하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고려의 끈질긴 저항(抵抗)은 몽고로 하여금 고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었던 것인데, 그러한 이면에는 고려와 몽고의 여러 전투 중에서 귀주성, 충주성 전투와 함께 처인성 전투의 승리가 결정적인 역할(役割)을 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고려에 대한 특별대우(特別待遇)는 이후 몽고 내부(內部)에 적지 않은 반발(反撥)을 불러일으켜서 수시로 이의(異議)가 제기(提起)되었다. 즉 고려를 다른 정복국가들같이 완전 점령하여 하나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맹렬(猛烈)한 저항정신(抵抗精神)과 역사적(歷史的)인 사례(事例)를 들어 만일 고려를 그렇게 대우하다가는 몽고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被害)가 오게 되고, 무엇보다 자신이 고려의 세자와 약속(約束)하였던 친선우호관계(親善友好關係)를 깨트린다는 점에서 그러한 요구(要求)들을 묵살(默殺)하였던 것이었다.

그 이후 쿠빌라이는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 전체(全體)를 원 제국에 편입(編入)시키면서도 고려에 대해서는 번왕의 대우를 지속하여 고려에 대한 자치(自治)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지금의 처인성은 다 허물어져 있던 토성을 1979년에 수축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월이 이미 800여년이나 흘렀으니 토성 안에 있는 나무들도 그 이후에 새로 심은 나무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고려 처인성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지만 그 자취는 그대로 남아 오늘날 나에게까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엄청난 몽고 대군의 전세를 바꾸어 놓았던 그 역사적인 현장을...
고려의 성들이 험(險)한 산을 끼고 견고한 석성(石城)으로 이루어져 있어 난공불락(難攻不落)을 자랑했던 것과는 달리 처인성은 방어를 위한 산성이 아니었다.

군(軍)의 양식(糧食)을 보관(保管)하고 지키는 창고(倉庫)였을 뿐이며 방어시설(防禦施設) 역시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주목(注目)을 끌게 되는 것은 이러한 시설(施設)보다도 이러한 곳에서 방어전(防禦戰)을 펼친 김윤후라는 인물(人物)이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토성 안에 쌓인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정겨웠다. 토성 아래 민가(民家)에서 개 한 마리가 쳐다보며 짓지도 않고 있었다. 저 개는 오히려 나를 매우 궁금한 표정(表情)으로 쳐다 보고 있었다.

김윤후는 처인성 승첩(勝捷) 후 조정으로부터 그 공로로 인하여 상장군(上將軍)을 제수(除授)받았으나 본인이 고사(固辭)하여 섭랑장으로 낮추어서 승복(僧服)을 벗고 무신(武臣)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몽고군의 침공은 30여년간 끈질기게 계속되는데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 30년 후에 충주성의 방호별감으로 임명(任命)되어 충주성을 지켜내는데 또 한 번 공로를 세우게 된다.

몽고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사공우복야 등 관직(官職)에서 활약한 것을 보면 김윤후는 군사적인 소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행정적(行政的)인 분야(分野)에서도 재능(才能)을 발휘(發揮)하였었다.

이로 볼 때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살리타이를 사살했던 사실은 우연히 운 좋게 맞이한 승리가 아니라 그의 매우 치밀(緻密)한 준비성(準備性)와 탁월(卓越)한 리더쉽이 발휘되었던 결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윤후가 훗날 충주성에서 예케[也窟]의 몽고군을 맞아 70일간을 버티며 승리를 얻었을 때에도 그가 이끈 군대는 정규군이 아닌 관노(官奴)와 노비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들이었다.

김윤후는 이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들 앞에서 노비문서(奴婢文書)를 불태우며 전쟁이 끝나면 신분(身分)에서 해방(解放)시키며 신분의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공로에 따라 관직을 주겠다고 선포(宣布)하여, 절망(絶望)에 빠진 수비군들을 오히려 용기백배하게 만들었다.

충주성에 사는 노비들 입장에서는 평생을 노비로 사는 것 보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노비라는 신분을 탈피(脫皮)할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이었다.

처인성과 충주성에서 보여준 김윤후의 장수(將帥)로서의 리더쉽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의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아무 준비(準備)도 되지 않은 사람들을 단시간(短時間)에 무서움을 모르는 막강(莫强)한 용사(勇士)로 탈바꿈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불세출(不世出)의 리더였다.

리더란 그냥 달콤한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순간적(瞬間的)으로 현혹(眩惑)시켜 따르게 만드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말에 대해 책임(責任)을 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에 대해서는 확실(確實)하게 보장(保障)해 주는 걸맞는 후속조치(後續措置)가 뒤따라 주어야 한다.

김윤후는 처인성과 충주성 두 번 다 그의 약속을 확실하게 실천(實踐)해 주었다. 처인부곡은 현으로 승격이 되었고 천민들은 모두 양인이 되었다. 충주성은 국원소경으로 승격되며 공로가 있는 자들에게는 면천(免賤)과 함께 관직까지 주어졌다.

또한 전쟁의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전투기술(戰鬪技術)을 가르치는가도 중요한 것이다.

지형지물(地形地物)의 이용(利用), 가장 공격하기 좋은 장소의 선택, 병사(兵士)의 배치, 적의 공성무기들을 대응하는 방법(方法), 성(城)의 한 쪽이 무너졌을 때의 신속(迅速)한 복구방법(復舊方法), 상황이 변(變)했을 때 재빨리 전선을 재배치(再配置)하는 방법 등의 현실적(現實的)이고 실용적(實用的)인 기법(技法)들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사기(士氣)가 높은 군사(軍事)들을 거느리고 있어도 이러한 기술(技術)과 전법(戰法)들이 없이는 효율적(效率的)인 전투를 벌일 수가 없는 것이다.

김윤후가 얼마나 효과적(效果的)인 전법(戰法)을 사용(使用)하였나 하는 것은 그 결과가 말해 주고 있다.

처인성에서는 일시적(一時的)이고 집중적인 사격을 통해 적장(敵將)을 사살하였고, 충주성에서는 70여일간(餘日間)의 몽고군의 포위에서도 끝까지 버텨내 오히려 포위한 자들을 지치게 만들어 물리쳤던 것이었다.

이는 금나라의 수도가 50여일간의 몽고군의 포위에 지쳐 처자식까지 잡아먹는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지리멸렬(支離滅裂)했던 것과 대비(對比)된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지치고 불안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이들에게 용기(勇氣)를 불러일으키는 지도자(指導者)의 의연(毅然)한 자세(姿勢)와 확고(確固)한 전망, 솔선수범(率先垂範)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고는 매일매일(每日每日) 달라지는 성민들의 인심(人心)과 수시로 떨어지는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고 고양(高揚)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김윤후는 그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이룩한 일련의 승리들, 처인성과 충주성에서의 전투들을 분석(分析)해 볼 때 이러한 리더의 자질(資質)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난세(亂世)를 당(當)하여 이러한 인물의 등장역시 고려의 저력(底力)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오솔길을 따라 버스가 한 대올라오고 있었다. 버스는 처인성 앞의 정류장(停留場)에는 서지도 않은 채 길을 따라 완장리 쪽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내리지 않고 타지 않는 처인성 정류장은 더 쓸쓸히 서 있었다.

우리는 흔히 고려가 원에 복속(復屬)된 이후의 100여년간의 역사는 우리 역사에서 다루지 않는다.

고려의 왕이 모두 몽고황제의 사위이며 고려의 왕비(王妃)가 모두 몽고여인(蒙古女人)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 사이에서 난 고려왕(高麗王)들은 이미 고려의 혈통(血統)보다 몽고의 혈통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려의 정통성(正統性)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왜곡(歪曲)된 사관(史觀)이다.

고려는 몽고에게 있어서 매우 독특(獨特)한 케이스였고 까다로운 상대(相對)였으며 또한 고려 정복 후 몽고가 고려인(高麗人)들을 상대할 때도 매우 조심(操心)하였던 사실들이 최근(最近)의 연구(硏究) 결과에서 하나씩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원 제국 휘하(麾下)에 있었던 100여년은 잃어버린 시간(時間)이 아니라 전 세계(世界)를 상대로 활발(活潑)하게 무역(貿易)을 하여 아랍과 유럽에까지 코리아의 위명(威名)을 떨쳤던 매우 역동적(力動的)인 시기(時期)로 속속(續續) 드러나고 있다.

몽고군의 고려 침공 방식(方式)은 독특했다. 칸을 비롯한 몽고의 대군이 금과 남송을 침공할 때에는 거점(據點) 중심(中心)으로 점령해 가는 방식을 택(擇)하였다.

즉 한 지역(地域)을 점령하고 그곳에 다루가치를 두어 직접 통치(統治)해 가며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에 반(反)해 고려 침공군(侵攻軍)들은 한 번 깊숙히 침구(侵寇)하였다가 일제히 물러갔다가, 다시 또 몰려왔다가 또 물러가는 방식이었다.

몽고군은 30여년간 6차례(次例)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게 되는데 6차 중에서도 침공과 퇴각(退却)을 반복(反復)했다.

예(例)를 들면 당올타이의 3차 침공은 세 차례에 걸쳐 침공과 퇴각을 반복하며 이루어졌고 차라타이의 6차 침공은 4차례에 걸쳐 침공과 퇴각을 반복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몽고군들이 고려에 오래 주둔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몽고군들은 고려 전역(全域)을 누비며 살륙과 방화(放火), 약탈(掠奪)을 무자비하게 자행(恣行)하였지만 몽고군 역시 고려의 군사들, 군민(郡民)들의 게릴라식 공격에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것이었고 많은 몽고 장수들이 피살(被殺)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처인성에서의 살리타이의 전사는 그 대표적(代表的)인 사례였다.

그러한 몽고 주둔군(駐屯軍)에 대한 습격(襲擊)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벌어졌기 때문에 몽고군들은 고려를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몽고군은 만약 고려의 내륙(內陸)에 뒤쳐지거나 너무 깊숙히 남하한 병력이 있을 경우에는 사자를 보내 빨리 돌아오도록 독촉하였을 정도로 고려에 병력을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몽고군의 입장에서 볼 때 처인성에서의 불의(不意)의 사고(事故)는 두고두고 경계(警戒)의 대상(對象)이 되었던 것이다.

처인성 전투는 몽고로 하여금 대 고려 전략(戰略)을 대폭(大幅) 수정하게 만들었다. 몽고는 고려에 대한 보복(報復)을 당분간(當分間) 유보(留保)한 채 금 정벌에 박차(拍車)를 가(加)하여 금의 수도 변경을 함락하자 옛 발해(渤海)의 땅에 웅거(雄據)한 동진(東晉)을 정벌하고 자칭(自稱) 황제인 포선만노를 사로잡게 된다.

원래의 몽고의 전략은 고려를 정벌한 후 동진을 공격하려던 것이었으나 고려 처인성에서의 패배(敗北) 이후 계획(計劃)을 바꾸어 동진부터 정벌하였던 것이었다.

고려 조정 역시 처인성 전투로 인하여 대 몽고 전략에 있어서 그 전까지의 소극적(消極的) 전략에서 적극적(積極的) 전략으로 일대 전환(轉換)을 맞게 된다.

당시 평양(平壤) 일대(一帶)는 홍복원이라는 고려의 수비 책임자가 원에 항복하여 원의 신하(臣下)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하자 평안도(平安道) 일대의 북계는 홍복원의 지휘 아래 몽고의 영향(影響) 아래 있었는데 살리타이의 전사 이후 몽고군이 철수하면서 사정(事情)이 달라졌다.

고려 조정이 홍복원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 군대를 주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몽고의 세력(勢力)을 등에 업은 홍복원은 자신의 위치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 조정에 항거하게 되고 고려 조정은 군대를 보내 홍복원 일당(一黨)을 축출(逐出)하고 평양 및 북계를 다시 회복(回復)하게 된다.

이는 몽고에 대한 선전포고(宣戰布告)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고려 조정의 바뀌어진 태도(態度)는 모두 처인성 승리 이후에 벌어진 변화들이었다.

몽고군은 그들의 장수(將帥) 살리타이를 사살한 처인성을 그 뒤에 그냥 두었을까?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하지는 않았을까? 몽고군이 그들의 장수 살리타이를 잃고 처인성에 대하여 대대적(大大的)인 보복행위(報復行爲)를 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몽고군들은 타고난 무사(武士)들이었다. 그들은 전투행위(戰鬪行爲)를 스포츠 행위(行爲)와 같이 신성시했다.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戀戀)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장수를 사살한 처인성에 대해 경의(敬意)를 갖고 보았을지도 몰랐다.

살리타이의 1차 침입 때 몽고군은 평안도 지역의 자주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성의 부사(府使)였던 최춘명은 끝까지 사수(死守)하여 방어하였다.

고려 조정이 오히려 몽고에 항복하고 난 후 사자를 보내 자주성의 방어를 풀게 하였다. 그러나 최춘명은 고려 조정의 지시를 묵살하고 끝까지 항거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고려의 관리는 몽고의 관리(官吏)가 보는 앞에서 최춘명을 항명죄(抗命罪)로 죽이려고 하였다. 그 때 최춘명을 오히려 몽고의 관리가 살린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는 비록 명(命)을 거역하였지만, 너희에게는 충신(忠臣)이 된다. 우리도 죽이지 않았는데 이미 우리와 화친(和親)을 맺은 너희가 성을 온전(穩全)하게 지킨 충신을 죽여서야 되겠는가?”

몽고인(蒙古人)들은 전쟁 자체(自體)를 신성시했고 승패(勝敗)에 연연하지 않았던 무사들이었다.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은 고려의 태자가 중국까지 가서 쿠빌라이를 만남으로써 종막(終幕)을 선언(宣言)하게 된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보면서 옛 고구려를 떠올리며 감탄(感歎)하게 만든 그 이면에는, 몽고가 수없이 이기고 진 수많은 전투 중 유례(類例)없이 침공군 총대장을 전사시킨 처인성 전투가 그 중앙(中央)에 우뚝 자리잡고 서 있었던 것이다.

버스가 또 한 대 올라오고 있었다. 낙엽이 흩날리는 처인성을 뒤로 하고 버스를 탔다. 학교(學校)가 파할 무렵인지 쓸쓸하게 보였던 한낮과는 달리 버스 안에는 어린 학생(學生)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학생들은 아곡리에도 내리고 완장리에도 내렸다. 짙은 눈썹, 둥그런 눈동자, 꼭 다문 입술, 어린 모습들이었지만 그들의 이목구비(耳目口鼻)는 뚜렷했고 표정은 활기(活氣)가 넘쳤다.

이들은 누구의 후예일까? 처인부곡 아니 처인현민들의 후예일까?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몇 대째 내려오는 천민의 굴레를 벗으려 이곳 처인성에 올라 쟁기질 하던 팔뚝에 강(剛)한 고려활을 들고 힘차게 시위를 당겨 들판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들을 기억(記憶)할까?

그 싸움의 결과로 얻어진 노획물(鹵獲物)로 신분의 굴레를 벗고 배를 타고 대해(大海)로 나가 아라비아 상인(商人)들과 교역(交易)을 하며 고려를 세계 속에 알렸던 조상들의 뒤를 좇아, 몇 년 뒤면 뛰쳐나가게 될 세상(世上)을 바라보며 지금도 학교에서 책(冊)과 씨름하며 싸우고 있을까?

위 글은 처인성 전국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수필 부문 수상작 입니다

- 황명진(경기도(京畿道)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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